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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와 각종 성경공부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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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강 욥 기 32 ~ 37

. 인과응보

 

1. 행한대로

사람들이 상식, 기본, 진리로 간주하는 대표적 주장이 인과응보’, ‘행한대로 받는다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상식이기 전에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하시고 행위원리를 선언하셨습니다. 인간은 복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비유를 맞추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었고, 저주를 받을 까 두려워하거나 겁을 먹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행위원리를 주장한다면 을 도입해야 할 이유가 없고, 억울함을 호소해야 할 이유도 없다. 사람이 선을 행하였으면 당연히 선의 결과가 임할 것이고, 악을 행하였으면 당연히 악의 결과가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어떤 외부적 상황에 의하여 행동이 제약당하지 않을 수 있도록 최상, 최고, 최적의 상태를 만들어 주신 이후에 인간에게 행위원리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행위원리는 말 그대로 행한 것의 결과가 임하는 것이기에 별도의 상이나 벌의 개념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2. 신의 도입하다

인간은 행위원리를 주장하면서 삶에 신을 도입하였습니다. 인간의 행동에 대하여 신이 공정한 판단을 하고 적당한 결과를 제공하는 역할을 의뢰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행위원리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반증입니다. 어떤 사람이 선을 행하였음에도 선한 결과가 임하지 않기에 억울함을 느끼고, 신이 억울함을 풀어주기를 기대합니다.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하였음에도 악한 결과가 임하지 않기에 분노하면서 신이 악행을 행한 자에게 중벌을 가해주기를 기대합니다. 행한 대로 결과가 임하지 않는다고 인간 스스로 행위원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행위원리는 하나님의 원리이기 때문에 변개되거나 소멸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는 죄를 범하였기에 결과적으로 죄인이 되었고, 죄인이 되어서 계속하여 죄를 행하고 있기에 계속하여 죄의 결과가 임하여 죄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죄인이 도무지 선을 행하지 않기에 선의 결과가 임하지 않기에 죄인이 개선의 여지가 전혀, 일체 없습니다. 사람들은 죄의 존재, 죄인의 정체를 인식하지 못하기에 스스로 행할 수도 없는 원리, 스스로도 인정하지 못하는 원리를 주장할 뿐입니다.

 

3. 하나님의 개입

인간은 인간의 삶에 신을 도입시키면서 신에게 엉뚱한 역할을 위탁했습니다. 마치 자신들의 행동은 정당한데 공정한 심판이 없어서 공정한 결과가 임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였기에 공의를 행하는 신을 도입한 것입니다. 인간은 전지, 전능하지 못하기에 인간의 행동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약점이 있어서 행동과 구별된 결과가 임할 수 있기에 전지, 전능한 신의 역할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신에게도 행위원리를 적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죄인이 되었음을 아십니다. 죄인은 도무지 행위원리를 적용할 수 없음을 하십니다. 그래서 공의를 행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인간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가 없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기에 하나님이 죄인에게 행위원리, 인과응보를 절대로 적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의 사역은 일체의 자격이나 조건을 요구함이 없이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복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는 심판자가 절대로 아니며, 인간을 행한대로 갚으시는 방식의 공의의 하나님이 절대로 아니며, 인간을 상벌로 통치하시는 지배자가 절대로 아닙니다.

 

4. 세 친구와 욥의 논쟁

세친구와 욥의 세 번의 논쟁의 핵심은 행위원리였습니다. 세 친구는 신의 공의를 주장하며 욥이 곤경을 당한 것은 전적으로 악을 행한 결과라고 강조하고, 상황의 변화를 위해서는 악을 벗고 돌아서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욥은 과연 신이 행위원리대로 공의롭게 행한다면 악인의 형통함에 대하여 설명하라고 반박하였습니다. 인간이 죄인임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인간이 도입한 신의 역할에 대해 결론이 날 수가 없기에 논쟁은 논쟁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이 말을 그치니’(32:1)에서 욥은 하나님 앞에 의인됨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친구들의 주장에 대한 악의 결과로 형벌을 받은 존재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일 뿐입니다. 아마도 세 친구는 욥이 신의 공의를 인정하지 않기에 추가적으로 신의 형벌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을 것입니다.

 

 

. 젊은이의 주장 (32~34)

 

1. 젊은 사람 엘리후

엘리후가 가장 늦게 등장하는 이유는 그들의 나이가 자기보다 여러 해 위이므로’(32:4) 즉 엘리후가 가장 젊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삶의 경험과 경륜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기에(15:18, 20:4) 연장자는 젊은이보다 지혜롭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32:6~6), ‘나는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노라 당신들의 슬기와 당신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노라’(33:11)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젊은 엘리후가 등장하고 주장하는 내용은 새로운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미 엘리후는 욥의 주장에 대해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32:2)라고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보다 의롭다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욥은 단지 친구들이 주장하는 행위에 근거한 신의 공의에 대해 동의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세 사람이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32:3)에 대하여 화를 내며 자신을 주장을 펼칩니다. 물론 엘리후는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32:8)고 합니다. 젊은이들이 새로운 주장을 내세울 때 늘 앞세우는 말입니다. 과연 엘리후는 다른 주장을 할 수 있을까요?

 

2. 엘리후의 하나님

구약의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모두가 신을 섬기고 있지만 우상의 신을 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닙니다. 당연히 욥기의 세 친구들이 언급한 하나님’(), 엘리후가 언급하는 하나님’()도 우상의 신을 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내용은 하나님 스스로 말씀하시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들에게서나, 하나님의 사역을 경험한 자들에게서만 드러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만나서 계시하는 과정이 없는 사람 즉 세 친구와 엘리후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바른 내용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엘리후가 말하는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느니라’(33:4), ‘나와 그대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니’(33:6) 등의 하나님의 영, 하나님을 포함한 대부분의 신과 관련된 표현은 모두 일반적인 ’, 우상 신을 의미합니다.

 

3. 신의 계몽적 역할

엘리후는 신의 전혀 다른 활동과 역할을 강조합니다. “그가 사람의 귀를 여시고 경고로써 두렵게 하시니 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그는 사람의 혼을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을 칼에 맞아 멸망하지 않게 하시느니라”(33:16~18), “실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재삼 행하심은 그들의 영혼을 구덩이에서 이끌어 생명의 빛을 그들에게 비치려 하심이라”(33:29~30)는 신의 계몽적 활동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앞서 친구들에게서 신의 행동에 대하여 공의적’, ‘심판적측면에 대한 주장은 이미 등장하였고 욥을 설득하지 못하였기에 엘리후는 신의 계몽적측면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이미 세상에서 우상의 신들에 대하여 설명되고 기대되는 역할이었습니다. 어떤 우상의 신도 단지 심판만을 행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모든 우상의 신은 자비와 공의상과 벌로 인간을 지배하고 다스립니다.

 

4. 전능하신 신

엘리후도 욥이 곤란을 당한 것에 대하여는 악을 행한 결과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욥에 대해 나는 깨끗하여 악인이 아니며 순전하고 불의도 없거늘 참으로 하나님이 나에게서 잘못을 찾으시며 나를 자기의 원수로 여기사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33:9~11)고 말하는 것에 대해 의롭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부인하셨고 내가 정당함에도 거짓말쟁이라 하였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화살로 상처를 입었노라”(34:5~6)고 말하는 것을 욥이 비방하기를 물마시듯 하며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한패가 되어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 이르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 하는구나’(34:7~9)라고 말하는 것으로 비난합니다. 결국 엘리후가 주장하는 하나님()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 하시나니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34:10~12)입니다. 신이 옳고 욥이 틀렸고, 욥이 당한 곤란은 악의 결과라는 주장의 반복, 순환입니다.

신의 심판의 공정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행악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사망의 그늘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없으시니 세력 있는 자를 조사할 것 없이 걱으시고 다른 사람을 세워 그를 대신하게 하시느니라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행위를 아시고 그들을 밤 사이에 뒤집어엎어 흩으시는도다 그들을 악한 자로 여겨 사람의 눈 앞에서 치심은 그들이 그를 떠나고 그의 모든 길을 깨달아 알지 못함이라”(34:21~27)는 신의 전능성을 강조합니다.

 

 

. 교훈의 신 or 은혜의 신 (35~37)

 

1. 듣지 않는 신

엘리후는 신의 전능성과 공정성을 강조하기에 인간에게 가치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악인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부르짖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음은 헛된 것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하물며 말하기를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판단하심은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말하는 그대일까보냐”(35:12~14)고 조롱합니다. 도리어 그러나 지금은 그가 진노하심으로 벌을 주지 아니하셨고 악행을 끝까지 살피지 아니하셨으므로 욥이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 업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35:15~16) 즉 욥이 벌을 덜 받아서 아직도 대들도 있다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2. 교훈 or 복음

하나님은 능하시나 아무도 멸시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사 악인을 살려두지 아니하시며 고난 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며 그의 눈을 의인에게서 떼지 아니하시고 그를 왕들과 함께 왕좌에 앉히사 영원토록 존귀하게 하시며 혹시 그들이 족쇄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의 얽혔으면 그들의 소행과 악행과 자신들의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나니 만을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형통한 날을 보내며 즐거운 해를 지낼 것이며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36:5~12)는 이성적인 신, 교훈적인 신에 대한 이론입니다.

세상의 교훈과 기독교의 복음은 표현상 내용이 유사합니다. 세상의 신과 기독교의 하나님은 속성상 전능성, 공정성, 계몽성이 유사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인간이 죄인임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은 아시기에 하나님에게는 죄인을 향한 은혜가 있고, 죄인을 위해 친히 하나님이 일하시는 사역이 있습니다. 세상의 교훈은 신에게 합당한 행위를 하라는 선동이고, 기독교의 복음은 하나님이 인간을 도와주셨다는 복음의 선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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