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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강해 10] ‘조서를 내리노라’
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
놀라 급히 일어나서
금 신상을 만들고 절하라고 했는데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절하지 아니하여 참소를 당하였고 풀무불에 던짐을 당하였지만 살아 나왔습니다. 왕은 밖에서 보기만 했지, 풀무불 속은 어땠는지 모르니까 궁금한 것이 많았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불꽃이 드러났지만 내부는 불이 없었는지, 밖에서 보기에는 엄청나게 뜨거웠는데 내부는 시원했는지, 분명히 세 사람을 던졌는데 네 사람이 다니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게 누구였는지, 왕이 세 사람을 불러서 나오라고 했을 때 그 소리가 들렸는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능히 건져내실 것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는지. 하지만 왕은 질문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왕이 궁금해 하고, 상대방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하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2.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
느부갓네살은 꿈 해석이 있은 후에 하나님을 찬양했었는데 이번에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3:27~29). 그렇다고 신앙고백을 한 것은 아니고, 앞으로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다짐한 것도 아닙니다. 우상 종교는 신이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고, 또 신을 하나만 섬겨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한 신이 모든 것을 주관한다고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언급할 때 늘 남의 신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너희 하나님은’(2:27)입니다. 그 신에 대하여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오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라고 칭송을 할지언정 그것은 느부갓네살의 신이 아니라 그냥 ‘너희 하나님’일 뿐입니다. 비록 꿈과 관련된 문제를 다니엘의 하나님이 해결했다고 하더라도 느부갓네살은 큰 제국을 다스리는 왕이요, 자신을 도와주는 신이 더 크고 위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국의 왕은 늘 이런저런 문제를 만나고, 그 때마다 문제들을 해결해 왔습니다. 그러니 기껏해야 하나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그 신을 모든 신들의 신으로 인정할 리가 없습니다. 그저 예의상 하는 표현일 뿐입니다. 이번에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3:28, 29)입니다. 결코 ‘나의 하나님’ 또는 ‘느부갓네살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자기의 권세가 더 높기 때문,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유익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먼저 일하고 수고해서 결과를 만들어 내고 그 결과를 인간에게 은혜로, 선물로 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받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공짜로. 받은 줄로 몰랐는데 알고 보기 받은 것이고, 받을 때는 몰랐는데 알고 보니 매우 귀한 것이고, 나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가 나오는 것이고, 그렇게 좋은 은혜를 주신 분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하고, 그 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의 모습, 그런 신앙의 순서를 보여주는 것이 다니엘이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입니다. 느부갓네살로 인하여 죽을 뻔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3:17)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3. 그 몸을 쪼개고
하나님을 찬양한 후에 느부갓네살이 한 말은(3:29)은 이방 종교의 방식이요, 우상 종교의 패턴, 아주 못되고 패역한 종교의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모르는 자들이 행하는 미련한 열심, 전혀 쓸모없는 부지런함, 도리어 부패와 왜곡을 만들어내는 어리석은 수고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완벽히 하나님을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절대로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권위를 내세우며 복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해 경솔히 말하거나 행동하면 징계하겠다고 위협, 협박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은혜를 주신 후에도, 복을 주신 후에도, 하나님이 친히 수고해서 인간에게 유익과 혜택을 주신 후에도 은혜를 기억하라, 은혜를 갚으라, 하나님을 따르라, 하나님께 복종하라고 절대로 명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두려움에 근거하면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께로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감동해서, 감격해서, 감사해서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좋겠다고 고백하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느냐 섬기지 않느냐는 그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서 인정을 받아내시느냐, 하나님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하게 역사하시느냐, 하나님이 그 사람이 감사하다고 고백할만하게 은혜와 복을 베풀어 주시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4. 더욱 높이니라
풀무불에서 살아나온 세 사람에게 느부갓네살이 한 조치가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이니라’(3:30)입니다. 갈대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아주 불공정한 조치이고, 매우 화가 나는 일입니다. 왕의 명령을 따라 허다한 바벨론 사람과 포로로 끌려온 유다 사람들이 절을 했습니다. 당연한 일이었기에 어떤 상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불순종한 세 사람은 절을 하지 않았고, 왕의 명령을 거역하였기에 왕이 말한대로 풀무불 속에 던짐을 당했고 용케도 살아나왔습니다. 세 사람을 참소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들이 살아 나온 것이 바벨론에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그들이 왕을 위해서 무엇을 했습니까? 바벨론 사람들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 덕을 본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왕이 금 신상을 만들고 절하라는 우상 숭배를 했지만 하나님이 느부갓네살에게 내린 징계나 형벌이 없습니다. 포로로 끌려온 유다사람들은 세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상에 절했지만 하나님이 그들에게 징계나 형벌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세 사람은 절을 하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했지만 하나님이 상을 주신 것이 없습니다. 세 사람은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이미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 은혜가 있었기에 이들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은 것,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한 것은 저들의 공로가 아니고, 공로가 아니니 상 받을 일도 없는 것입니다.
Ⅱ. 조서를 내리노라
1. 조서를 내리노라
왕은 하나님을 알리고픈 마음에 조서를 내리지만(4:1~3) 하나님의 원리, 기독교의 방식과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여호와 신앙은 공권력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에게 여호와를 소개할 때 권위에 근거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신앙과 관련하여 상대방은 절대로 강요받으면 안 됩니다. ‘너를 위한 것이다’라는 명분으로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면 안 됩니다. ‘나중에 이게 얼마나 고마운 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하면서 지금은 조금 억지를 써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먼저 은혜를 주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고,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누리면서 감격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은혜를 누리면서, 자신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간증으로 복음이 증거되고 전파되는 것이 기독교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모른다면, 받은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가 전하는 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입니다.
2. 왜 바벨론에서
기독교가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강조합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으로서 모든 인간을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다른 나라, 다른 민족,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방치하고 오직 이스라엘만 도와주겠다는 의미가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이 사람들만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일하시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겠다는 의미, 즉 이스라엘을 샘플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돕는 것처럼 다른 나라, 다른 민족, 다른 사람들도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기에 유다를 위해서도, 바벨론을 위해서도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항상, 범사에, 풍성히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