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T기본글꼴 기본글꼴✔ 나눔고딕✔ 맑은고딕✔ 돋움✔ ✔ 뷰어로 보기 다니엘 강해 11 / 평안함이 장구하리이다 / 다니엘 4:19-28 조회 수 195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Extra Form 예배 날짜 2023-03-26 아래의 URL을 클릭하시면 유튜브 영상으로 설교시청이 가능합니다. https://youtu.be/jcfj91_-HE8 [다니엘 강해 11] ‘평안함이 장구하리이다’ Ⅰ. 느부갓네살의 신하 1. 허다한 무리들 출애굽한 숫자가 장정만 603,550명, 여자와 아이들을 합치면 대략 200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우리가 아는 사람은 모세, 아론, 여호수아, 갈렙 정도일 뿐입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부터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구체적인 사역도 받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리고, 평생 하나님의 종으로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하나님이 하라는 일들을 했습니다. 모세처럼 생활한 사람은 모세 한 명뿐이고 나머지 603,549명은 평범한 일상을 살았습니다. 모세는 모세의 역할을 했고, 레위지파들은 레위 지파로서의 역할을 했고, 나머지 모든 백성은 각 사람의 생활, 지극히 개인적이고 가정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했고 예수를 구주로 믿은 사람이 삼천, 오천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가 아는 사람은 스데반, 빌립, 바울, 바나바 정도일 뿐입니다. 스데반과 빌립은 사도들 대신 봉사하는 일을 맡기려고 뽑은 집사이었고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이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는 말씀을 하셔서 안디옥 교회가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과 빌립의 행적은 짧게 나오고 바울의 전도여행이 더 많이 나옵니다. 바울은 바울의 역할을 했고 삼천이나 오천 명에서 하나님이 따로 세운 서너 사람 빼고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은 매우 평범한 일상을 살았습니다. 물론 출애굽한 모든 백성이나 구원받은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마음과 심정과 기준과 원리와 가치와 방법과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2.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 유다 백성들이 세 번에 걸쳐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옵니다. 많은 포로들 중에서 우리가 아는 사람은 겨우 네 명,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일 뿐 나머지 포로들, 다른 유다인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거의 모릅니다. 성경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위해서는 풀무불에라도 들어가고, 사자굴에라도 들어가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신상을 만들지 말라고, 절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상에게 절하는 사람은 모두 죽인다고 하지 않습니다.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 닥친 위험한 상황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느부갓네살이 만든 것입니다. 네 사람이 하나님 일을 하다가 시련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네 사람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기기 전에 일단 시험을 해 보신 것이 아닙니다. 네 사람의 사례를 보여 주면서 모든 유다 포로들에게 네 사람처럼 살라고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1~4장의 사건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들의 일상을 문제 삼지 않았으니 바벨론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3. 느부갓네살의 신하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이 꿈 때문에 번민하고 잠을 이루지 못할 때 꿈을 해석해 주어서 마음 편히 잘 수 있도록 느부갓네살을 위해서 일합니다. 생존을 위한 다니엘의 배신적 행위, 독단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일에 개입하셨고, 친히 하나님이 느부갓네살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다니엘은 일상을 접어둔 채 하나님을 위해 일하다가 한 번 느부갓네살을 도와준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일상에서 느부갓네살의 신하로서 살았습니다. 이것이 여호와 신앙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타종교와 기독교의 가장 본질적인 차이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타종교의 어떤 신들과 다른 분이시기에 기독교의 신앙 목적도 다르고, 기독교의 종교 양식도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을 존중하시고, 더 나아가 인간을 위해 친히 일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위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희생한다, 헌신한다는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는 하나님 때문에, 교회 때문에, 신앙 때문에 인간이 어려움당하고, 불편함을 당하는 일이 존재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어려움에 처한 인간이 신앙으로 극복하는 것이고, 불행한 인생이 하나님으로 인해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전하는 소식을 기쁜 소식,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Ⅱ. 평안함이 장구하리이다 1.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유다만을 위해서 일하신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지금까지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사역을 행하십니다. 아브람의 후손들도 도와주셨고, 애굽도 기근이 들었을 때도 도와주셨고, 앗수르에 요나를 보내시기도 하셨고 이번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을 도와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바벨론을 강대국으로 만들어 주신다는 의미가 아니고, 느부갓네살이 왕 노릇을 더 오래하도록 도와주신다는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사역의 궁극적 목적은 언제나 계시,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하나님의 어떤 도움이나 은혜가 임하여도 결론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은 바벨론에서도 역사하신다는 것, 하나님은 포로로 끌려온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고 보호하신다는 것, 하나님은 풀무불 가운데에서도 살려내시는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 등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에게 꿈을 주신 목적은 ‘왕께서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2. 깨달은 후에야 꿈에 의하면 왕이 고생을 한답니다. 하나님은 지금 느부갓네살에게 장차 사람들로 말미암아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시는 것일 뿐 하나님이 직접 이런 일을 행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느부갓네살을 미워하셔서, 감히 유다를 공격한 바벨론의 왕이니까 싫어하셔서 왕으로 하여금 쫓겨나게 하고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게 하고 이슬에 젖게 만드시겠다는 의도가 절대로 아닙니다. 꿈과 환상을 포함한 예언에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축복 예언 또는 은혜 예언 또는 구원 예언 즉 하나님이 도와주시겠다는 것, 새롭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행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잘하면 하나님이 상이나 복을 주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을 하나님이 작정하고 행하셔서 기어코 인간에게 복이 되게 만들어 주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 축복 예언입니다. 다른 하나는 저주 예언 또는 심판 예언, 대표적으로 ‘화 있을진저’로 시작되는 예언들입니다. 사람들이 행하는 것을 보니까 죄이고, 하나님이 진노해서 그들에게 징계와 형벌을 내리겠다는 의미가 절대로 아닙니다. 도리어 저들이 죄를 지어 죄의 결과를 당할 것이기에 하나님이 장차 저들에게 임할 결과를 알려 주시며, 얼른 죄를 중단하고, 얼른 악에서 돌아서서 참담한 죄의 결과를 피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에게 징계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주의, 경고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3. 평안함이 장구하리이다. 느부갓네살은 정말 엄청난 은혜,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두 번에 걸쳐 꿈을 주시고, 다니엘을 통해 해석까지 주셔서 당차 당할 일들을 알게 하셨습니다. 왕이 이런 은혜를 받을 만한 공로를 세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은혜를 주시는 이유는 느부갓네살도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복락을 누리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왕의 평안함이 장구할 수 있는 길도 알려주신 것이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입니다. 전혀 종교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찬송해야 합니다,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제사를 꼬박꼬박드려야 하고, 절기를 신실하게 준수해야 합니다, 성전 중심으로 사셔야 합니다’같은 내용이 아니고,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 삶의 우선 순위를 하나님께 놓아야 합니다’같은 내용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심정과 기준과 가치와 방식과 능력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의 결과, 하나님의 열매, 하나님의 성품인 평안함, 자유함, 온유함, 양선함, 오래참음, 절제함이 장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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