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T기본글꼴 기본글꼴✔ 나눔고딕✔ 맑은고딕✔ 돋움✔ ✔ 뷰어로 보기 에스라 강해 6 / 총독, 제사장 / 에스라 3:8-13 조회 수 1994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Extra Form 예배 날짜 2023-07-02 아래의 URL을 클릭하시면 유튜브 영상으로 설교시청이 가능합니다. https://youtu.be/rasz93bjvlI [에스라 강해 6] ‘총독과 제사장’ Ⅰ. 사람들 1. 포로들의 생활 에스라서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주도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계획하거나 의도하거나 시도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호소하거나 기도하거나 부탁을 한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힘들다고 부르짖거나 하나님은 뭐하시느냐고 원망이나 투정을 한 것도 없습니다. 포로들의 생활에 관해, 포로들 중의 지극히 일부, 달랑 서 명의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다니엘서인데 다니엘이 전혀 포로 같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포로로 매우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소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생하는 내용, 멸시받고 조롱받는 내용이 없고 하루라도 빨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모습도 없습니다. 물론 다니엘과 세 친구가 여러 가지 곤란한 경우를 당하기는 하지만 포로이기 때문에 당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의 꿈과 관련된 위험은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도 직면한 것이었고, 금 신상 사건과 기도사건은 그들이 너무나 잘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시기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포로 귀환 사건은 백성들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행하신 것입니다. 2. 이방의 사람들, 유다의 사람들 포로 귀환을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신 인물이 바사의 왕 고레스입니다. 하나님은 유다와 바사의 대결구도를 형성하지 않았고, 바사에 여러 가지 재앙을 내리는 것도 아니고, 고레스에게 엄청난 형벌을 내리거나 제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고레스를 찾아오셨고 마음을 감동시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게 합니다. 고레스는 포로를 귀환하게, 성전을 재건하게, 물건들을 제공하고, 성전 기물까지 되돌려주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방의 왕, 대적의 나라 왕도 사용하십니다. 유다 백성 중에 어느 누구도 포로 귀환 사건과 관련하여 한 일이 없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자원한 것이 아닙니다. 70년이 되면 돌아가리라는 하나님의 예언을 의지하면서 인내하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이 아니라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아니라면 아무 의미없다고 하면서 오직 귀환할 날만을 사모하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돌아가면 성전을 재건할 것이니까 미리 준비를 해야겠다면서 바벨론에서 장사를 하든, 농사를 짓든 열심히 일해서 많은 재산을 모아서 건축 준비를 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예루살렘은 멀리 있으니 성전을 위해 당장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지만, 성전 기물들이 바벨론의 신들의 신당에 있으니 언제든 예루살렘 성전에 둘 수 있도록 어떻게든 기물들을 구입하려고 노력하고 있던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돌아온 사람들에 대해 딱 한 마디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라고 합니다. 3. 다 똑같은 사람들 성경은 돌아온 사람들의 수준, 상태, 자세, 태도, 신앙의 정도 등에 대해 한 마디도 해 주지 않습니다. 귀환자들 중에는 델멜라와 델하르사와 그룹과 앗단과 임멜에서 올라온 자들, 그들의 조상의 가문과 선조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 밝힐 수 없는 자들, 계보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한 자들도 있습니다. 이들도 자원한 사람들이 아니고, 준비된 자들이 아니고, 예루살렘과 여호와의 성전을 사모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귀환자에 포함된 것은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바사의 왕 고레스나,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나 델멜라와 델하르사와 그룹과 앗단과 임멜에서 올라온 자들이나 아무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국적이 어디든, 출신이 어디든, 신분이 무엇이든, 수준이 어떻든 전혀 차이가 없고 딱 한 가지 공통점, ‘하나님이 마음을 감동시켰다’만 있습니다. 4.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의 선택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모든 민족, 열방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모델, 샘플로 삼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나는 거룩한 여호와니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의 ‘거룩’은 ‘다르다’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죄와 다른 것, 죄의 마음과 기준과 가치와 원리와 방식대로 행하는 우상과 다르다는 것이요, ‘너희도 거룩하라’는 죄의 마음과 기준과 가치와 원리와 방식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과 기준과 가치와 원리와 방식과 능력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상징적 표현이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18:3~5)입니다. ‘거룩’을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혈통적으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거룩하기 위해 이방인을 몰아내야 하고, 외국인을 배제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포로를 귀환시키면서 유다와 베냐민 지파뿐만 아니라 이방인 고레스도 감동시키셨고, 근본과 출처를 모르는 사람들도 감동시키셨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Ⅱ. 총독, 제사장 1. 총독 스룹바벨 귀환자들의 대표가 스룹바벨과 예수아(여호수아)입니다. 하나님이 두 사람을 특별히 선택해서 귀환자들의 대표로 지정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모여 자체적으로 투표를 해서 대표로 선정한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제비뽑기를 했는데 두 사람이 뽑힌 것도 아닙니다. 바사는 주변의 많은 나라들을 정복했고, 지배하고 있습니다. 제국으로서 통치 정책이 있고, 운영 시스템이 있습니다. 정복한 나라, 정복한 민족, 정복한 지역들을 관리하는 제도가 있습니다. 반란을 일으키지 않게 통제하고, 세금을 잘 내고, 지시를 잘 따르게 하는 법이 있고, 규례가 있습니다. 또한 바사의 법에 따라, 바사 왕의 임명을 받아 유다에 파견을 나와 유다를 관리하고 지도하고 감독하는 직분이 있고, 그 직분을 맡은 직분자 즉 관리자, 통치자, 지배자가 있습니다. 그 직분이 대표적으로 ‘총독’입니다(스1:8, 5:3, 학1:1). 스룹바벨은 바사에서 유다지역의 관리자로 임명한 총독, 바사가 파견한 관료이었습니다. 2. 제사장 예수아 바사가 정복한 지역들을 각자 알아서 살라고 방치한 아닙니다. 고레스가 유다 지역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하나님이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너무나 단순하게 ‘하나님이 가라니까 너희는 가라. 그리고 하나님이 성전 지으라고 하니까 성전 지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가들이 평가하기를 앗수르는 강압적인 통치를 했고, 바사는 관용적인 통치를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관용적인 통치는 방치가 아니라 맞춤형 통치입니다. 바사는 유다의 지역적 특색도 파악했고, 역사적 상황도 파악했고, 그 동안 열강들 속에서 어떻게 줄타기를 했는가 정치적 여정도 파악했고, 유다의 종교에 대해서도 관찰을 마친 것입니다. 끌려왔던 관료들을 유다로 돌려보내서 유다를 관리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여호와의 성전을 세워주는 대신 여호와의 율법이라는 것을 이용해서 유다를 관리하고 통치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 역할을 대제사장에게 맡겨서 예수아를 유다에 파견한 것입니다. 스룹바벨, 예수아는 모두 바사가 임명한, 바사가 파견한 바사의 관료들입니다. 3. 정치적 or 종교적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는 바사가 내세운 사람이요, 바사를 위해 일하는 사람, 바사가 원하는 대로 행하는 사람, 바사의 뜻에 맞게 유다에서 행동하는 사람, 단순히 유대의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고 종교인이 아니라 바사가 파송한, 바사가 관리하는 정치인입니다. 이들이 하는 행동은 종교적인 활동이 아니라 정치적인 활동입니다. 바사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러한 제도로, 이러한 방법으로 유다를 통치하는 것입니다. 3장에 반복되는 표현이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기록된 규례대로’, ‘다윗의 규례대로’입니다. 바사가 유대의 각종 규례로 유다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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