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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강해 11]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
Ⅰ. 에스라라 하는 자
1. 에스라 시대
유다는 나라가 패망하기 전부터 바벨론에 시달리고 포로로 끌려갔었고, 패망한 것이 주전 586년이고 포로 생활이 7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바사가 바벨론에 승리하여 유다를 접수한 것이 주전 538년입니다. 하나님이 바사의 왕 고레스를 감동시켜서 바벨론 시대에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 중에 원하는 사람은 유대 땅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조서를 내렸고 바벨론의 신전에 있던 여호와의 성전 기물들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대표, 리더 또는 인도자가 스룹바벨과 예수아였습니다. 돌아온 사람들이 성전 재건을 시작하였다가 15년간 중단되었고,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4년 만에 완성하여 봉헌을 한 것이 주전 516년입니다. 바사의 네 번째 왕 아하수에로가 새로운 왕후를 맞아들였는데 에스더가 왕후 후보부터 왕후로 등극하기까지 4년이 걸렸고 그 때가 주전 481년입니다. 에스더가 왕후가 되고 5년이 지났을 때, 왕의 총애를 받던 하만이라는 사람이 모르드개의 일로 분노하여 유다 민족을 멸절할 계획을 세웠고, 우역곡절을 거쳐 반대로 유다인들이 하만의 민족을 대략 75,810명을 몰살한 것이 주전 476년경입니다. 에스더의 남편 아하수에로가 바사의 네 번째 왕이고, 본문의 아닥사스다가 바사의 다섯 번째 왕이고, 아닥사스다가 왕이 된 때가 주전 465년이고,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것이 주전 458년입니다.
2. 에스라라 하는 자
에스라에 대한 소개가 다양하고 엄청납니다. 일단 족보가 7:1~5절에 걸쳐 16대 조상까지 나옵니다. 또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6절), ‘여호와의 계명의 말씀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 학자요 학자 겸 제사장인 에스라’(11절)입니다. 에스라는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10절)고 합니다. 유다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여호와 대신 우상을 숭배해서 나라가 망했습니다. 유다에는 여호와 신앙을 가르치는 사람이 없었고, 배울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상황적으로 판단해 볼 때 에스라는 바사에서 출생하고 성장했을 것입니다. 바사에는 여호와를 섬기는 것도 없고, 여호와의 종교를 가르치는 곳도 없고 도리어 바벨론의 온갖 수상 종교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도리어 예루살렘에 성전이 재건되고 종교가 60년째 운영되고 있기에 율법에 익숙한 사람,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는 인물이 등장한다면 예루살렘 또는 성전에서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에스라는 성전에서 배우고 성장한 인물이 아니라 바사에서 나고 자란 사람입니다. 과연 에스라에 대한 소개가 말 그대로 이런 내용, 이런 의미일까요?
3. 역설적 패턴
에스라서에 나오는 에스라의 인물과 활동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역 원리 또는 하나님의 사역 패턴을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은 어떤 사람의 신앙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한 계시 사역인데, 하나님의 계시 사역에는 크게 3가지 특징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 생각에 불가능해 보이는 사건을 진행하고, 사람들 생각에 적당하지 않은 사람을 사용하고, 사람들 생각에 도무지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3중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하나님이 행하실 때 ‘하나님은 이런 분이구나’라고 하나님을 배울 수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하나님이 선택하고 사용하신 인물들은 신앙 좋은 사람, 믿음 있는 사람, 모두가 보기에 인정받고 존경받는 사람이 전혀 아니라고 했습니다. 에스라에 대해 시대적으로나 상황적으로나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은데 뜬금없이 족보도 자그마치 16대 조상부터 나열을 하고, 과도하게 신실하고 대단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사용하는 전형적인 역설적 표현으로, 모두가 인정할 만한 집안 출신에, 모두가 인정할 만한 능력과 실력과 신앙과 믿음이 있다고 소개하여, 모두가 이 사람을 기대하게끔 묘사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정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하는 행동은 옳은 것이 아니라 엉뚱한 것이고,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사람이라고 소개되었다면 이 사람이 하는 행동은 하나님의 뜻과는 다를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Ⅱ.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1.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에스라에 대한 소개에서 주목해야 하는 표현은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6절),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9절)입니다. 하나님의 도움, 은혜는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다는 것은 그 사람이 잘해서 상을 주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그 사람이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 사람을 칭찬하는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자비하심, 하나님의 일하심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에스라가 속국 유대 출신의 관료인데 바사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라고 소개되는 것은 에스라가 지혜롭고 현명하고 유능한 인재라서 바사 왕 아닥사스다의 총애를 받고 있기에 왕이 너무 애지중지하면서 에스라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라의 절반이라고 주겠다고 자처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라가 너무 신앙이 좋고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을 감동시켜서 하나님이 에스라가 하는 모든 일이 큰 상을 주어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모두 다 받을 수 있도록 포상을 내린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에스라가 얼마나 신실하고 충성스러운가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하는 자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2.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예전에 유다 왕과 백성들이 유다에서 바벨론으로 끌려 간 적이 있습니다.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니까 준비가 잘 되었을 리가 없고, 가는 과정이 순탄할 리가 없는데도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 없이 모두 바벨론에 도착했습니다. 또 대략 80년 전에 바사의 왕 고레스가 조서를 내려서 포로들 중의 일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1차 귀환이 있었습니다. 왕이 조서를 내렸을 뿐이지 귀환자들을 우대했을 리가 없습니다. 4만 명이나 되는 그들에게 특별한 교통편을 마련해 준다거나 편리한 숙박시설을 제공해 주었을 리가 없는데도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 없이 모두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에스라는 개인 자격으로, 임의로, 향수병에 시달려서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사의 관료로서 아닥사스다의 왕명을 받아 왕의 사신의 신분으로 예루살렘으로 행차를 하는 것입니다.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가 공적 업무를 위해 출장을 가는데 바사가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은 다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굳이 에스라가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었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에스라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존경을 표하는 것이 아니고, 에스라가 하나님의 일에 충성해서 상을 받은 사람이라고 칭송하는 것이 아니고, 에스라를 본받으라고 신앙의 모범적 인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3. 일하시는 하나님
기독교는 하나님이 명령한 것을 인간이 열심과 수고와 충성을 다해 완수하여 잘했다고 칭찬받고 상을 받는 패턴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과업을 주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인간이 일꾼이 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능력있는 일꾼, 쓰임받는 일꾼, 충성된 일꾼이 될 이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을 도와주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행복을 누리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