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URL을 클릭하시면 유튜브 영상으로 설교시청이 가능합니다.
https://youtu.be/un95EShySz0
[에스라 강해 13] ‘은혜를 얻게 하셨도다’
Ⅰ. 토라는 법이 아니다.
1. 예수님의 재판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사역을 행하시다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에게 잡히시고(마26:47, 요18:3),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끌려 갔고, 그곳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어서 대제사장 주재로 공회가 개최되어 예수를 재판하게 됩니다. 이 재판에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을 하고 다만 사형집행권이 로마에 있기에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가서 자신들의 결정을 통보하고 십자가 처형을 시행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하게 되고 빌라도는 민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저들의 요청을 받아주고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 형으로 죽임을 당하십니다. 이 장면에서 사람들은 유대교가 죄없는 예수님을 잡아서 사형 선고를 내렸다고 비난합니다. 즉 유대교가 사람을 잡아가고, 재판을 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다만 재판을 하려면 공정하게 해야 하는데 죄없는 예수님을 정죄하고 사형을 결정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제사장이 사람을 잡아가도 됩니까? 대제사장이 재판을 하고 형량을 결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까? 그들이 재판을 하고, 죄가 있는지 없는 지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율법을 근거로 드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율법을 그런 용도로 주신 적이 있습니까?
2. 법이 아니라 원리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법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토라는 ‘교훈, 지침, 원리’ 즉 인간이 준행하여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삶의 원리, 삶의 지침, 삶의 안내입니다. 하나님은 토라를 법으로 주신 적이 없고, 토라를 준행하면 상을 받고, 토라를 준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되어서 형벌을 내리는 체계로 활용하신 적도 없습니다. 출애굽 이후에 토라가 주어졌고, 가나안 입성 후에 토라를 실행하기에 토라 준수여부가 가나안 입성 여부의 기준이 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에 살 때에도 토라가 상을 받거나 벌을 받는 규정으로 작용되지 않았습니다. 토라의 상징인 십계명(열마다 말씀)에는 단 한 번도 상급이나 면류관 징계나 처벌의 내용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토라의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제사법의 핵심은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이 정해주신 예물을 드리면 사죄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법은 정교하게 정해지고 엄격하게 시행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제물에 대해 규정한 다음에 ‘만일 힘이 미치지 못하면,,’이라고 하나님이 먼저 피할 길을 열어 주십니다. 애초에 하나님의 토라는 법이 아니었습니다.
3. 하나님을 아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토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규정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아는 것, 규정 하나하나를 엄격하게 준행하는 것이 아니라 토라를 주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하나님의 마음과 심정이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토라를 실천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의 마음과 심정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토라는 넉넉하게 실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법을 아주 정교하게 제정하는 것에 집중하지 않았고, 백성들에게 율법의 조항을 철저하게 숙지하지도록 반복 교육하지 않았고, 지도자들에게 율법을 아주 강력하게 운영하도록 단속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 알 수 있도록 다양한 계시를 지속적으로 펼치신 것입니다.
토라는 법이 아니었기에 토라(율법)이 법률체계로서 사람들의 생활에서 작동한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토라를 법처럼 운영할 사람, 일종의 경찰이나 검사나 변호사나 판사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구약에는 어떤 사람이 율법 조항을 근거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잡아가고, 형벌을 내리는 내용이 아예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신분을 하나님의 토라를 운영하는 대표로 세우지 않은 이유는 죄인들 중에는 하나님을 아는 자, 하나님의 마음과 심정을 아는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데 이런 역할을 맡기면 그때부터 그 사람은 마치 권력을 잡은 것처럼 사람위에 군림하고, 사람을 지배하고 통제하고 상벌로 사람마치 권력을 잡은 것처럼 사람위에 군림하고, 사람을 지배하고 통제하고 상벌로 조정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신앙의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이 대제사장이었지만 구약에서 가장 존재감이 없는 직분이 대제사장입니다.
Ⅱ. 은혜를 얻게 하셨도다.
1. 아닥사스다의 행동
조서를 내린 아닥사스다 왕은 유다 사람이 아니라 바사 사람이요,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바사의 신을 섬기는 사람이요, 여호와를 알고 여호와 신앙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왕으로서 자기의 통치 하에 있는 각 나라의 신들을 다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다신교에서는 우상 숭배라는 개념이 없고 다른 신을 배척하는 것이 없습니다. 넓은 지역을 통치하니까 각 지역에 해당하는 신들을 수용하고, 제국을 운영하려면 다양한 기능들이 필요하니까 각 기능에 해당하는 신들을 다 불러모으는 것입니다. 그 신들에게 적당한 집을 지어주고, 일정한 종교적 양식을 제공해 주면서 자기 나라의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 것입니다. 바사의 아닥사스다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도, 심지어는 이스라엘의 솔로몬도 동일한 행동, 동일한 조치를 했습니다.
2. 학자 겸 제사장
아닥사스다가 여호와의 율법을 아는 학자 겸 제사장인 에스라를 유다의 총독으로 파견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법관과 재판관으로 세우라고 합니다(7:25). 구약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 하나님이 주신 토라가 ‘법’으로 왜곡되는 전환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잊고 떠났을 뿐 하나님을 왜곡하거나 여호와 신앙을 왜곡하지는 않았습니다. 종교적 목적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으로 아예 작정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 바사 시대부터인데 동시에 하나님의 토라에 대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오해와 왜곡과 변질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첫째, 정치와 종교가 합쳐졌다고, 종교가 권력이 되는 일이 발생한 것으로 첫 번째 사람이 바로 바사가 유다의 통치자로 파견한 율례 학자 겸 제사장인 에스라입니다. 에스라 본인이 두 가지 권력을 장악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신앙에 대해 알지 못하는 바사 왕, 여호와가 주신 토라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자기 나라에서 하던 방식대로, 자기가 하던 방식대로, 정치적 권력을 가진 자가 종교적 영역까지 지배하는 제도를 드디어 유다에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명령, 왕의 명령
바사의 왕 아닥사스다가 에스라를 유다의 통치자로 파견하면서 지시한 내용이 ‘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법관과 재판관을 삼아 강 건너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중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입니다. 바사는 여호와의 토라를 하나의 법으로 인식하고, 그 법으로 백성들을 통치하기로 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에스라를 세운 것처럼, 에스라도 유다 땅에 가서 법을 잘 아는 자를 골라서 법관과 재판관 또는 행정관, 관리로 세우고, 법으로 백성들을 통치, 관리하라는 것이요, 이를 위해 백성들에게 준행해야 할 법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7:25) 이스라엘에 처음으로 정치와 종교가 연합된 통치자로 에스라가 등장하였고, 이윽고 여호와의 토라를 하나의 법으로 세우고 이를 운영하고 관리하는 관리들이 세워지는 체제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에스라와 관리들이 여호와의 토라를 법으로 규정하는 나라를 운영하는 방식이 ‘무릇 네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여 혹 죽이거나 귀양 보내거나 가산을 몰수하거나 옥에 가둘지니라’(7:26)입니다. 바사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은 모두 복종해야 할 명령이요 법입니다. 이 두 가지를 유다를 통치하는 법으로 규정하였고, 법을 잘 아는 자를 행정관 또는 관리자로 세웠고, 백성들에게는 법을 따를 수 있도록 법을 가르치게 하였고, 그 다음 순서는 법을 준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형벌을 가하는 것입니다. 드디어 여호와의 말씀에서 신앙적 의미는 모두 사라지고 오직 법률적 의미만 남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