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URL을 클릭하시면 유튜브 영상으로 설교시청이 가능합니다.
https://youtu.be/fmVQ4kL3Q-c
[에스라 강해 2] ‘감동시키시매’
Ⅰ. 감동시키시매
1. 바사 왕 고레스
많은 설교들에서 창12장에 아브람이 처음 나오는데, 그 동안의 아브람의 행적이 없는데 아브람은 믿음의 사람이었다, 순종의 사람이었다, 헌신하는 사람이었다고,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왔고, 쓰셨고, 복주셨다고 강조하고, 결론은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사람이 되자, 순종의 사람이 되자, 헌신하는 사람이 되자고 합니다. 기독교에 의하면 아브람도 죄인인데, 아브람도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자인데, 그 전까지 아브람이 하나님을 만난 적도 없고 하나님에 대해 배운 적도 없는데, 아브람이 먼저 하나님을 찾아 온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고 나선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 어느 것이라도 바치거나 드린 것도 없는데 왜 아브람을 헌신의 사람이라고 하는지 납득도 되지 않습니다. 모세, 요셉, 다윗이 등장할 때에도 주로 사람들을 칭찬하는 설교를 합니다. 그런 설교의 공통점은 은혜가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수고하고, 노력하고, 준비했고 그것을 보고 하나님이 복주고 상 주었으니 은혜가 등장할 이유가 없습니다. 인물 중심의 설교방식대로라면 고레스가 성경에 나오는 어느 누구보다 칭찬을 받아야 하는 사람 같습니다. 하나님이 감동시키시매 감동을 받고 즉각적으로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립니다. 고레스는 매우 온유한 사람 같고, 순종의 사람 같고, 겸손한 사람 같습니다.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는 재료들을 내어주라고 하니 고레스는 헌신하는 사람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주체, 신앙의 주체는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1:1절에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말씀을 주신 분도 하나님, 그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는 분도 하나님, 그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2. 애굽의 노예, 바벨론의 포로
성경에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에서 사로잡혔다가 풀려나는 이야기가 두 번, 출애굽과 출바벨론입니다. 창세기에서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들어갈 때는 끌려간 것이 아니라 총리의 가족으로서 초청받아 갔고, 애굽의 바로에게 말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고센이라는 지역을 할당받았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게 되어 결국 애굽의 종, 애굽의 노예로 전락하여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되고 학대를 받게 되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여전히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게 되고, 이때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드디어 출애굽의 대 역사를 진행하십니다.
바벨론 시대의 상황은 정반대입니다. 유다나라가 패망하여 포로 신세로 바벨론으로 끌려오게 되고 어느 지역에 거주했는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막막했는데 어쨌든 버텨가면서 자리를 잡았을 것이고, 관료직에 들어가는 사람도 생겼고, 바벨론이 강력한 제국으로 오래 지속되지도 않았습니다. 바벨론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날마다 절규하면서 빨리 70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애원하지 않았고, 70년만 지나면 당장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하지 않았고, 하나님에게 70년이 지나면 돌아가게 하신다는 말씀을 잊으시면 안 된다고 하나님에게 닦달하지 않았고, 아니면 사는게 너무 힘들어서 70년을 기다리기가 너무 어려우니 제발 지금이라도 도와달라고 부르짖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3. 출애굽, 출바벨론
스1~3장의 귀환 이야기는 출애굽 때와 비교할 때 세 가지가 없습니다. 하나는 출애굽 때처럼 백성들의 탄식과 부르짖음이 없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열가지 이적과 기적을 행하시는 것도 없습니다. 마지막 하나는 백성들의 찬양이 없습니다. 대신 출애굽 때와 똑같은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출애굽 때에도 출바벨론 때에도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단지 외면상으로는 출애굽 사건이 멋있고 출바벨론 사건은 매우 밋밋합니다. 상황을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출바벨론은 따분하고 출애굽은 흥분됩니다. 하지만 당사자의 입장이라면 전혀 다릅니다. 애굽에 노예로 있는 백성의 입장이라면 하루하루가 긴장 그 자체입니다. 출애굽을 시키려면 한 번에, 단 칼에 하실 것이지 왜 10번씩이나 하는지, 초장에 가장 쎈 것으로 한 방에 끝내지 왜 약한 것부터 살짝 살짝해서 바로가 계속 말을 번복하게 하는지, 애간장이 탈 것입니다. 애굽을 나왔더니 홍해가 있어 원망과 불평이 쏟아집니다. 홍해를 건넜다고 좋아해서 춤추고 노래했더니 물이 없어서 목말라 죽겠고, 물을 먹고 났더니 배고 고파 죽겠고, 만나를 먹고 났더니 광야를 지나가야 하는데 그 세월이 40년입니다. 두려움과 불안과 염려와 걱정이 끊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대로 바벨론에서 귀환하는 백성들은 아주 태평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지도 않았는데, 왕에게 탄원서를 제출하지도 않았는데 어느 날 불쑥 왕이 조서를 내립니다. 너무나 자상하고 친절하게 왕이 먼저 나서서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라고 합니다.
4. 감동시키시매
출바벨론이 가능한 것은 ‘여호와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입니다. 정작 환호성을 지르고 찬송을 해야 할 장면은 출애굽보다 출바벨론 때입니다. 백성의 입장에서는 나가기 수월하게 해 주셨으니까 더욱 고맙고 감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출애굽때에는 찬송을 하면서 호들갑을 떠는데 비해서 출바벨론 때에는 별 반응이 없습니다. 출애굽때에는 자신들의 행동, 자신들의 수고, 자신들의 노력, 자신들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절실하다고 생각하고 그러니까 출애굽이 감격스럽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부르짖었다는 것, 마음을 졸였다는 것, 하루하루 애간장이 탔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았으면 헛수고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했든 안 했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출바벨론 때에는 사람들의 부르짖음도 없었고, 애간장도 없었는데 돌아갈 수 있었다면 더 감동해야합니다. 내가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좋은 일이 생겼으니 더 감격하고 더 감사해야 합니다.
Ⅱ. 그의 백성 된자
1. 그의 백성 된 자는
고레스는 조서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의 백성 된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세상 모든 나라를 주셨다고 말하지만 그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그의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 중에 끼지 않습니다. 고대 사람들의 신 개념에서 신은 한 민족의 신이라는 것입니다. 신이 여러 나라를 택하지 않고, 여러 민족이 같은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갈대아 사람들, 바벨론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신이 있고, 바사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신이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다른 신을 섬기지도 않는 것이고, 다른 민족들에게도 자신들의 신을 섬기라고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2.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
고대 사람들의 신 개념에서 신은 한 지역의 신입니다. 고레스가 자기가 성전을 짓지 않는 이유는 자기는 여호와의 백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성전은 누가 지어야 하느냐, 당연히 ‘너희 중의 그의 백성 된 자’입니다. 또 고레스가 자기 나라 즉 바사에 성전을 짓지 않는 이유는 여호와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유대의 백성들, 그의 백성 된 자는 유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계신 그 하나님이시다’입니다. 즉 예루살렘이라는 장소와 여호와라는 신을 하나로 연결시킨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방을 제외한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세상을 제외한 예루살렘에만 거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상을 창조하셨고, 모든 사람을 창조하셨으며,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으로서 모든 사람을 돌보시고 모든 곳에서 사역을 행하시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