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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와 각종 성경공부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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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 예레미야 17 ~ 22

. 하나님은 토기장이 (17~19)

 

1. 유다의 죄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17:1)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한 가지 행동, 특정 행동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예언서를 제외한 대부분의 구약에서는 특별히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전에는 죄를 짓지 아니하다가 예언서 시대에 더욱 악한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 동안은 심판, 진노, 저주를 받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갑자기 더욱 패역하여 더 이상은 간과할 수 없을 정도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처음에는 자비와 인내로 용납하시다가 이제는 징계와 채찍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통전적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17:5),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17:7)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시대와 상황과 관계없이 동일한 원리입니다.

 

2. 거짓되고 부패한 것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17:9)입니다. 기독교와 기타의 인식의 본질적 차이는 바로 인간이 죄인에 대한 것입니다. 세상은 인간이 죄인임을 알지 못하기에 인간 존재의 변화는 언급하지 않은 채 인간의 가능성을 언급하고 인간에게 불가능한 행동을 촉구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존재와 한계를 아시기에 죄인에게 회개, 변화를 요구하는 대신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변화될 인간의 모습을 예언하시는 것입니다.

 

3. 여호와여

영화로우신 보좌여 시작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17:12),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17:14),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17:17)입니다. 기독교가 여호와를 강조하는 것은 여호와를 존귀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권세와 능력을 언급하는 것은 그만큼 죄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17:13, 2:13)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경쟁하지 않으시며, 인간 상호간에도 경쟁을 시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멸하고 인간을 도와주십니다.

 

4.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17:22)를 권고하십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하면 예물을 받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아니하면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고 그 불이 꺼지지 않게 하겠다고 하십니다(17:24~27). 하나님이 유독 안식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 규정은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않는 것즉 인간이 스스로 살아가기 위한 , 수고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는 것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요청하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책임을 자청하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비유

토기장이 비유의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만들더라’(18:4, 6)는 하나님의 독단이나 취향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임과 역할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18:8, 10, 11)는 권고와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18:12)는 거부는 여호와가 역할을 감당하셔야 함을 증거합니다. 예레미야에게 옹기를 사고 너는 함께 가는 자의 목전에서 그 옹기를 깨뜨리고...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읍을 무너뜨리리니’(19:1, 10~11)고 하십니다. 그러나 토기장이의 본분은 깨는 자가 아니라 만드는 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 종교적 갈등 (20~21)

 

1. 제사장 vs 선지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책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18:19)고 합니다. 제사장이요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인 바스훌이 예레미야의 예언함을 듣고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다음날 예레미야를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에서 풀어주매’(20:1~3)입니다. 제사장과 선지자가 충돌을 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소명 받을 때 이미 위험이 예고되었고 하나님이 구원하겠다는 약속이 있었지만 실제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두려움을 느꼈고 하나님께 항변했고, 상대방을 위한 하나님의 징계를 요청하기까지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들의 자녀를 기근에 내어 주시며 그들을 칼의 세력에 넘기시며 그들의 아내들은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되며 그 장정은 죽음을 당하며 그 청년은 전장에서 칼을 맞게 하시며...’(18:20~23)고 합니다. 하나님은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이 포로 되어 옮겨지니리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너의 거짓 예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도 그와 같으리라’(20:6)고 하십니다. 특별히 바스훌에게만 임할 징계가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든 이스라엘에게 임할 일일 뿐입니다.

 

 

2. 예레미야의 갈등

예레미야는 사역에 대한 심한 갈등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있었습니다.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20:7~9). 한편으로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20:10)는 소리를 들을 때에 두려움을 느꼈고, 다른 한편으로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므로 큰 욕을 당하오리니 그 치욕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20:11)라고 안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구약의 인물들은 죄인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예레미야의 절규(20:14~18)는 미처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을 풍성히 알지 못할 때에 나오는 전형적인 반응입니다. 성도는 구약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모든 것을 알고 자원하는 자들입니다. 신약의 스데반과 바울의 고백과 비교하면 뚜렷하게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만큼, 감당할 만큼 즐거움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3. 너는 간구하라

21장은 시드기야 시절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으로 인해 곤고함을 당할 때 바스훌과 제사장 스바냐를 보내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모든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21:1~2)고 합니다. 왕과 제사장이 직접 기도하지 않으며, 여호와께서 반복하신 대로 돌이키며’, ‘공의와 정의로 행하면도 전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은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이 경고하신 죄의 결과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실상 바벨론으로 인한 곤고함도 죄의 결과 중의 하나인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유다의 왕 시드기야와 그의 신하들과 백성과 및 이 성읍에서 전염병과 칼과 기근에서 남은 자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과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칼날로 그들을 치되 측은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리라’(21:7)입니다.

 

4. 다른 응답

하나님께서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21:8)인데 내용은 이스라엘의 기대와 전혀 다르게 이 성읍에 사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려니와 너희를 에워싼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 것이나’(21:9)입니다. 여호와가 도우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를 기대했는데 나가서 항복하라는 응답이 왔으니 전혀 응답이라고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너는 정의롭게 판결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 때문에 내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오리요 하거니와 나는 네 대적이라’(21:12~13)입니다. 바벨론만 악하게 여길 뿐 본인들의 악행은 전혀 고칠 생각이 없으며, 바벨론만 물러가기를 바랄 뿐 하나님의 말씀과 원리대로 살 생각도 없습니다.

 

 

. 유다의 왕들아 (22)

 

1. 유다 왕의 집에 내려가서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똑 같습니다. 왕이라고 더 막중한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왕위에 앉은 유다 왕이여 너와 네 신하와 이 문들로 들어오는 네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22:2)입니다.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다윗의 왕위에 앉을 왕들과 신하들과 백성이 병거의 말을 타고 이 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22:3~4)로 가장 확실하고 안전하고 행복한 제안입니다. 반대로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22:9) 황폐하게(22:5~8) 될 것입니다.

 

2. 살룸(여호아하스), 여호야김, 고니야(여호야긴)

요시야의 아들 살룸(여호아하스)에 대하여 그가 이 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잡혀 간 곳에서 그가 거기서 죽으리니 이 땅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22:11~12)고 하신대로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잡아 갔더니 그가 거기서 죽으니라’(왕하 23:34)로 응답되었고, 여호야김에 대하여 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 밖에 던져지고 나귀 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22:19), 고니야(여호야긴)에 대하여 고니야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빼어 네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네가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대아인의 손에 줄 것이라’(22:24~25)고 하신대로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그의 어머니와 신복과 지도자들과 내시들과 함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왕이 잡으니’(왕하24:12, 15)로 이루어졌습니다.

 

3. 하나님의 탄식

여호와 신앙에서는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중에 언제나 아는 자가 안타까워하고 역할을 합니다. 죄인과 하나님 중에 하나님이 절규, 탄식, 호소, 애원하시고 하나님이 신실, 열심, 헌신하십니다.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네 모든 악 때문에 수치와 욕을 당하리라’, ‘고통이 네게 임할 때에 너의 가련함이 얼마나 심하랴’(22: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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