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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와 각종 성경공부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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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강 예레미야 35 ~ 40

. 서로 다른 방식 (35~36)

 

1. 레갑 족속의 어리석음

레갑 족속의 행동은 어이없는 해프닝입니다. 레갑의 아들 선조 요나답이 자손들에게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너희가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고 너희는 평생 동안 장막에 살라고 하였기에 명령한 대로 행하였다는 것입니다(35:6~10). 그런데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올라오자 스스로 군대를 피하여 예루살렘으로 옮겨와서 살기로 하면서 선조들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여호와의 선지자인 에레미야가 여호와의 집으로 초청하여 포도주를 권면하는 것은 조상들의 명령을 근거로 거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레갑 족속의 순종, 신실함을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레갑의 족속들은 조상의 명령이라고 목숨 걸고 지킨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존에 위협이 생기자 스스로, 과감히, 너무나 당연하게 살기 위해 조상들의 명령을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권면은 조상들의 명령을 핑계로 거부합니다. 레갑의 후손들은 신실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중요한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다만 레갑 사람의 가문유다 가문을 대조시켜(35:18, 36:3) 더 패역한 이스라엘을 가르치기 위해 그만한 것으로라도 교훈을 삼으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2. 신실한 불순종

인간은 부지런히, 열심히 삽니다. 다만 죄에 대하여 신실할 뿐 하나님에 대하여는 불순종, 패역, 거부로 일관합니다. 레갑 족속이 조상의 명령에 순종한 이유는 조상에 대한 사랑이나 존경이 아니라 자신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 형통의 방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는 형통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레갑 족속은 조상과 하나님을 대조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의 방식과 하나님의 방식을 대조한 것입니다. 조상이든 하나님이든 상관이 없고, 전통이든 계명이든 현실이든 오직 자신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방식이면 되는 것입니다. 나름 옳은 생각, 합당한 방식, 실용적인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고 순종을 기대하실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표현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6:4-5)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방식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더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장 좋은 방식을 제안할 뿐 아니라 그 방식을 친히 책임지시고 보장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제외하고 단지 수단, 방식에 집중한 결과가 이스라엘의 현실입니다.

 

3. 말씀을 낭독하라

레갑 조상은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35:7)고 조언하였고, 하나님도 내가 내 종 모든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고 끊임없이 보내며 이르기를 너희는 이제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켜 행위를 고치고 다른 신을 따라 그를 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가 너희와 너희 선조에게 준 이 땅에서 살리라’(35:15)고 하셨는데 조상의 말을 듣고 순종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도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정반대로 내가 그들에게 내리려 한 모든 재난을 책에 기록하게 하시며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리니를 기대하십니다(36:1~3).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실 계획, 심판과 형벌을 내릴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오직 자비, 긍휼이고 하나님의 조치는 구원, 치유, 회복뿐입니다.

 

4. 듣고 놀라

여호와의 성전에서 낭독된 여호와의 말씀으로 모든 백성이 여호와 앞에서 금식을 선포하지만(36:9) 정작 고관들은 듣고 놀라 서로 보며’(36:16), 왕과 신하들은 두루마리를 태울 뿐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자기들의 옷을 찢지 아니하였고도리어 서기관 바룩과 선지자 예레미야를 잡으라고 명령합니다(36:20~26). 왕과 고관들이 듣고 놀라 두루마리를 태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기대와 달랐기 때문이요, 자신들이 하나님보다 지혜롭고 현실감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고관들이 바룩과 예레미야에게 숨고 알리지 말라, ‘잡으라고 하였지만 여호와께서 그들을 숨기셨더라그리고 다시 말씀하시고 기록하게 하심으로 저들의 조치가 무용함을 알게 하십니다.

 

 

. 스스로를 속이는 세상 (37~38)

 

1. 스스로를 속이는 기도

정세가 급변하기에 이스라엘은 매우 불안합니다. 바벨론 왕의 조치에 따라 유다의 시드기야가 새로 왕이 되었습니다.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37:1~2). 시드기야와 유다는 위기에 처하자 예레미야를 불러 하나님께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개선하고 유지할 것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전의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지, 유다라는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등은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위기탈출만이 목적입니다. 아무런 진실도 없고, 내용도 없고, 자신의 의지도 없는 스스로를 속이는 기도일 뿐입니다.

 

2. 스스로를 속이는 정치

갈대아의 군사(바벨론)들이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을 때 애굽이 유다를 돕기 위해 출정하였고 바벨론 군사들이 잠시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37:5, 11).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백성들에게 갈대아인이 반드시 우리를 떠나리라고 스스로 속여 말하지 말라고 권고하십니다(37:9).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한, 단지 상황에 근거한 사고, 신념은 신앙과 무관한 단순한 소망일뿐이요, 더욱 강력히 의지할수록 헛된 신념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모르고, 하나님의 권고를 듣지 않는 자들에게는 이렇게 하는 것만이 유일한 그러나 무익한 대안일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갈대아 군사들이 물러가자 사람들은 소망을 확고히 하기 위해 예레미야를 사로잡아(37:14) 희생양으로 만듭니다(38:1~6).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과 직면하여 그 동안에 유다에게 좋은 일만 예언했던 거짓 선지자들의 말이 틀린 것과 자신의 말이 옳은 것을 확인시켜 주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뜻대로 될 것임을 거듭 강조합니다(37:16~21). 이스라엘을 살리는 예언을 선포한 예례미야를 고관들은 죽이려하고 왕궁 내시 구스인은 왕께 청원하여 살려냅니다(38:7~13). 이방인보다 못한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왕은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다인을 두려워하노라’(38:19)일뿐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소서 그리하면 왕이 복을 받아 생명을 보전하시리이다’(38:20)를 신뢰하지 못합니다. 왕일지라도 나라와 백성에 대한 걱정은 없고 자신의 안위만이 최우선적인 관심을 두고, 심지어는 하나님께로 나온 말씀을 절대로 백성들에게 전하지 말라고 경고까지 합니다(38:24). 서로 속고 속일뿐 어디에도 진실이 없고, 평안이 없습니다.

 

3. 스스로를 속이는 종교

레갑 족속들도 스스로 전통을 어겼고, 고관들과 왕도 스스로를 속이고 있습니다. 종교인들도 여호와의 성전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선포되도 듣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처음부터 지속적으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갈대아인이 아직 침공을 하지 않을 때도, 정작 침공하여 패망의 위협을 받을 때도, 애굽으로 인해 갈대아 군대가 물러갈 때도, 시위대 감옥에 갇혀 죽음에 직면할 때도,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을 때도 아무런 흔들림없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자신의 입장과 공동체의 입장에 비추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원리대신 다른 말을 하고, 다른 방식을 택하면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종교에 불과할 뿐입니다.

 

 

. 여호와의 말씀대로 (39~40)

 

1. 이스라엘의 특성

하나님은 인류의 하나님이십니다. 열방의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후손만을 사랑하는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으로, 왕으로는 오직 다윗의 후손만을 세우는 분으로 축소시켜서는 안 됩니다. 아브람의 후손이나 다윗의 후손이 결코 특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한 나라를 세우거나, 강성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애굽과 앗수르와 바벨론은 나라를 세웠고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후손이 없어도 이스라엘보다 더 강성한 왕조를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은 인간이 죄를 이기고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대로

언제나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바벨론 왕과 군대가 예루살렘을 함락했고 유다의 왕과 군사들을 도망가다가 잡혔고, 죽었고, 포로가 되었습니다(39:1~10). 반대로 감옥 뜰에 있던 예레미야는 석방되고 구스인 에벳멜렉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목숨을 얻었습니다(39:11~18). 성경 전체가 계속하여 비교하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생각 즉 죄인들의 생각과 방식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방식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함락되었다는 것을 목도한 백성들은 그 자체를 슬퍼할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이 회복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권고를 받아들이는 신앙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패망의 아픔과 슬픔만 있지 불신앙의 참회와 순종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3. 이방인의 고백

바벨론의 사령과 느부사라단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곳에 이 재난을 선포하시더니 여호와게서 그가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으니’(40:2~3)라고 합니다. 성경이 자주 사용하는 이방인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부끄럽게하는 방식입니다. 가나안을 정탐할 때 가나안 여인 라합이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2:10~11)고 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이스라엘의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두는데 느부사라단은 네가 좋게 여기는 대로 옳게 여기는 곳으로 갈지니라’(40:4)고 자유를 선포하고, 노비들에게 자유를 주지 않고 압제하는데 느부사라단은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을 유다 땅에 남겨 두고 그 날에 포도원과 밭을 그들에게 주었더라’(34:12, 39:10)입니다.

 

4. 제 소견에 옳은 대로

들에 있는 모든 지휘관과 그 부하들이 바벨론의 왕이 그다랴를 총독으로 세운 것을 듣고 모여듭니다. 그다랴가 너희는 갈대아 사람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면서 바벨론의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유익하리라 보라 나는 미스바에 살면서 우리에게로 오는 갈대아 사람을 섬기리니 너희는 포도주와 여름 과일과 기름을 모아 그곳에 저장하고 너희가 얻은 성읍에서 살라’(40:10)고 합니다. ‘모압과 암몬 자손 중과 에돔과 모든 지방에 있는 유다 사람’, ‘그 모든 유다 사람이 쫓겨났던 각처에서 돌아와 유다 땅 미스바에 이르러 포도주와 여름 과일을 심히 많이 모으니라’(40:11, 12)입니다. 하나님도 예레미야를 통해 바벨론 왕을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에는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무관하게 단지 바벨론의 왕에게 위임받은 그다랴가 바벨론을 섬기라고 하자 모두 모여들어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매사에 듣지 않고, 순종치 않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죄의 원리와 달랐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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