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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와 각종 성경공부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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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강 열왕기상 17 ~ 22 장

 

Ⅰ. 하나님의 계시 (왕상 17장)

 

1. 하나님의 계시

역사적으로 아합 왕이 통치하던 때는 북 왕국에서 가장 번성하고 부강했던 시대였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행복에 초점을 맞추며 하나님을 모르면 부귀영화가 있을지라도 죄의 원리에 잡혀 행복하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죄인이 가장 잘 속는 때가 바로 상황이 좋을 때 즉 하나님이 없어도 될 것 같아 보일 때입니다. 아합이 바알과 아세라를 극성스럽게 섬길 때에 하나님은 징계가 아닌 계시를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김’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사건과 행위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계시의 내용은 이미 다양한 사건과 율법을 통해 인간에게 전달되어져 있고, 다만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다른 모습으로 반복될 뿐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 쪽의 적절한 준비가 전제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전적인 하나님의 주도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출생이나 성장 과정이 없고 하나님께 쓰임 받을 만한 전제조건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엘리야, 오바댜와 백 명의 선지자(18:3), 한 선지자(20:13), 그 선지자(20:22), 선지자의 무리 중 하나(20:35), 미가야(22:8) 등이 나타나고 사라집니다. 누가 더 위대한 선지자이고, 큰일을 행했고, 귀한 대접을 받았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사건의 분량이나 특이성이 선지자의 중요도를 의미하지 않고, 선지자의 활약에 따라 상응하는 보상이 수반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알게 된 결과로 나타나는 순종이 되도록 진행하십니다. 엘리야에게 갈멜산 사역을 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에 머물게 하시고 하나님의 손길을 통하여 음식을 공급하시고, 시돈에 속한 사르밧에 유하도록 하시고 과부를 통하여 공궤하게 하시고, 엘리야를 공궤하던 여인도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며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오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는 고백을 하게 하십니다.

 

3. 비와 바알, 하나님, 아합

하나님은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고(17:1), 말씀대로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시내가 말랐고,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고, 아합이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서 꼴을 찾으려 애썼고, 삼년에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고 말씀하시자(18:1) 큰 비가 내렸습니다(18:45). 자연의 질서에 비가 올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농사를 주관하는 신 바알을 섬기고 있었기에 하나님은 비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강성함을 위해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지만 정작 가장 기본적인 일조차도 감당할 수 없음을 알게 하십니다. 아합은 여호와를 찾는 대신 물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비를 내리는 조건으로 이방 신들처럼 제물을 요구하지 않았고, 신전을 요구하지 않았고, 왕의 충성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아합이 차라리 이방 신을 섬기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이유, 엘리야를 향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을 섬기는 순간 자신이 ‘왕’이 아니라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Ⅱ. 갈멜산에서, 호렙산에서 (왕상 18~19장)

 

1. 능력 대결은 없다

여호와는 엘리야로 하여금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맞서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애굽의 신들과 경쟁하신다고 해서 동등한 존재가 아니요, 사단이 하나님께 대적한다고 해서 동등한 존재가 아니요, 하나님이 상대하여 주신다고 해서 맞대결이 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바알의 선지자를 이겨야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과 어떤 존재와의 능력대결, 영적 전투란 애시 당초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대로 비가 오지 않기에 하나님의 능력은 증거 되었고, 다만 계시를 위하여 친히 하나님께서 대결의 자리에 임하는 것입니다.

 

2. 방법론은 없다

계시가 밝히 드러나도록 바알의 선지자는 숫자가 많고 여호와의 선지자는 달랑 한 명입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은 신을 부르기 위하여 바알의 이름을 부르고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 놀고, 큰 소리로 부르며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도 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인간이 신에게 호소하는 방법이요, 신의 도움을 청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 동안의 계시사건과 비교하여 다른 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없고 우상의 선지자들이 많은 것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계시를 행하던 창세기부터 여호수아에 나오는 사건들은 하나님은 능력을 행하시나 우상 신들은 아무 것도 행하지 못하는 유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나라와 같이 되어 스스로 우상의 종교를 따르고 있기에 하나님은 우상 종교의 허구성을 스스로 인정하게 만드는 유형으로 계시를 진행하신 것입니다.

 

3. 말로만

제단에 불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엘리야는 제물에 세 번이나 물을 부어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가득 차게 하고, 해가 진 저녁 소제드릴 때에 어떤 종교행위도 없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라고 말을 합니다. 엘리야는 기도를 한 것이 아니고, 물을 구하는 탄원이 아니요,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말’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불로 응답했다는 사실보다, 신이 종교행위가 없는데도 사람의 ‘말’을 듣고 응답했다는 사실에 놀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에 이스라엘은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수단과 방식’이 없는 종교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4. 호렙산에서

계시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엘리야가 하나님을 불러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엘리야를 부르셨고 사역을 준비시키셨습니다. 특별한 사람, 능력있는 사람, 신실한 사람, 리더쉽있는 사람 등으로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믿으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갈멜산의 엘리야가 이세벨 왕비의 살인협박에 놀라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청하고, 여호와의 사자의 공궤를 받아 호렙으로 옮긴 후에도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전혀 책망이나 징계를 내리지 아니하시고, 대신 엘리야가 기대한 강한 바람, 지진, 불 가운데가 아니라 세미한 음성으로 하나님의 행하실 역사를 알려주십니다. 하사엘을 아람의 왕으로, 예후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엘리사를 선지자로 세우게 하시면서 하나님의 행하심이 단지 한 사건, 한 나라, 한 시대만이 아닌 것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이 아합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남겨두신 칠천인이 있음을 알게 하심으로 엘리야의 마음을 위로하십니다.

 

 

Ⅲ. 아람과의 전쟁 (왕상 20~22장)

 

1. 첫 승리

갈멜산 사건에서 하나님은 엘리야를 높이고 아합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엘리야를 통해 아합을 깨닫게 하고, 아합을 통해 이스라엘을 깨닫게 하고, 이스라엘을 통해 열방을 깨닫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배우지 않기에 계속해서 계시가 등장합니다. 역사적으로 아합 시대에 이스라엘이 강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성경은 아합 시대를 강대국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아람의 벤하닷 왕이 올라와서 조공을 요구할 때 거부하자 아람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순간 하나님은 한 선지자를 통해 전쟁의 승리를 통해 아합으로 하여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고 하십니다. 아합이나 이스라엘이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먼저 계시를 행하십니다. 벤하닷을 돕는 32명의 왕에 비해 턱없이 연약한 지방 고관의 청년들 232명과 7,000명이 나아가 아람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전쟁의 승리가 아니요, 영토 확장이 나이요, 이스라엘의 강성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승리

하나님은 아합에게 선지자를 보내 전쟁을 준비하게 하시자, 아람의 신복들이 ‘여호와는 산지의 신이니 평지에서는 자신들이 강할 것’이라고 말하고, 왕들 대신 총독을 두고, 군대를 보충하고 말은 말대로, 병거는 병거대로 보충하는 전략을 짭니다. 결국 아람의 군대는 그 땅에 가득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두 무리의 적은 염소 떼와 같은 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아람 사람들의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는도다’는 말에 대항하여 전쟁을 승리하게 할 때에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고 선언하고, 과연 칠일 째에 접전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하루에 아람 보명 십만 명을 죽이며 승리합니다. 아합 왕은 벤하닷 왕과 조약을 맺고 빼앗긴 성읍을 찾고, 다메섹에 아합의 이름으로 거리를 만드는 조건으로 살려줍니다. 이 전쟁을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싸워 이긴 것으로 간주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배우지 않는 것입니다.

 

3. 나봇의 포도원 사건

갈멜산 사건에서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고 말했지만 불순종하고, 두 번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지만 여전히 불순종합니다. 이스라엘은 단지 왕과 왕비만이 아니라 모든 백성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고자 할 때에 이세벨의 계략에 의해 나봇과 함께 하는 장로와 귀족들이 외형적으로는 율법의 절차를 따르며 금식을 행하기도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죄의 원리를 따라 결국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습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임할 재앙을 경고하자 아합이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풀이 죽어 다니며 겸비하자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징계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는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합의 겸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강조되어야 합니다.

 

4. 아합의 죽음

두 번의 전쟁에서 승리한 아합은 남 왕국 여호사밧과 함께 아람과 전쟁을 벌입니다. 혼자도 이겼는데 두 나라가 연합하면 쉽게 이길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의 요청에 의해 하나님의 사람 미가야의 예언을 들었지만 무시하고 전쟁에 나갔다가 참패하고 죽음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지속적인 가르치심과 아합의 지속적인 불신앙이 대립되고 불순종의 결과가 언제나 수반되는 악순환입니다. 아합이 하나님 때문에 손해 본 것이 없고, 하나님이 아합을 제한하거나 속박하거나 압제한 것이 없습니다. 열왕기상은 솔로몬(1~11장), 여로보암(12~13장), 아합(16~22장)이 주요 인물입니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자신의 의도에 따라 나라를 강건하게 만든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왕들을 도와주신 것은 왕권의 강화와 강건한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왕들은 백성을 가르치고 열방을 가르쳐야 할 왕의 역할, 이스라엘의 역할에 실패했습니다. 왕들과는 다르게 무명의 선지자들이 등장하여 이스라엘의 가뭄과 기근과 전쟁을 해결하고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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