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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와 각종 성경공부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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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강 사무엘하 6 ~ 10 장

 

Ⅰ. 법궤와 하나님 (삼하 6장)

 

1. 법궤의 행적

성막(법궤), 절기, 제사 등의 제도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며, 신앙을 전수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성의 한계를 지적하는 요소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도착하자마자 하나님의 처소부터 마련하도록 명령하신 것이 아니었고, 성경에서 법궤의 이동 경로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법궤에 대한 충성이나 법궤 관리에 신중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법궤는 요단강 도하와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 백성들 앞에 있었고, 실로에 있다가 에벤에셀로 옮겨왔으나(삼상 4:3) 블레셋에게 약탈당하고 블레셋 지역을 전전한 후 벧세메스를 거쳐 기럇여아림 사람 중 아비나답의 집에 놓였고(삼상 7:2) 사울 시대에 한번 언급되었을 뿐입니다(삼상 14:18). 여호수아가 법궤를 어떻게 관리했는지, 사무엘이 법궤 주변에서 살았는지 분명하지 않고, 다윗 또한 늘 법궤와 함께 이동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법궤와 제사장의 거쳐도 서로 연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보시고 도와주고 계셨습니다.

 

2. 다윗의 의도

성경은 다윗을 성군으로 묘사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다윗을 의지하도록 권고하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지 다윗이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돌보고 계심을 증거하는 표지일 뿐입니다. 사울 왕, 블레셋의 왕들을 경험하고 이스보셋 왕과 경쟁한 다윗은 이미 왕권에 집착했고 정치적 술수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다윗이 삼만 명과 여러 가지 악기를 동원하여 법궤를 옮기려는 것은 다분히 이방적인 사고방식으로 왕의 권위의 상징으로 삼으려는 의도입니다. 여호와께서 웃사를 ‘진노하사’ 다윗도 ‘분하여’ 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방치해 버립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여호와의 궤를 자기에게로 오지 못하게 막았고, 하나님은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심을 알고 난 후에야 궤를 다윗 성으로 옮깁니다. 성막은 언급이 없고 다윗이 준비한 장막에 법궤를 두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을 축복하고 음식을 나눕니다. 아마 미갈은 다윗의 속내를 정확하게 알아차린 것 같습니다. 궤를 옮기는 동안 다윗이 춤을 추고 환호하는 것을 보고 심중에 업신여겼습니다. 다윗이 위험해 처했을 때에 미갈이 살려주었는데, 그 후 다윗을 미갈을 찾지 않다고 왕이 된 후에 남의 부인이 된 자신을 데려온 것과 시온 성을 다윗 성으로 명하는 것과 법궤를 옮기려는 의도를 모두 정치적으로 파악한 것입니다. 미갈에 대한 다윗의 ‘여호와께서 네 아버지와 그의 은 집을 버리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았다’는 대답도 왕권을 강조한 자랑에 불과합니다.

 

 

Ⅱ. 성전과 하나님 (삼하 7장)

 

1. 죄인의 발상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다윗의 행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왕이 될만 한 자질과 공로가 있어서 왕을 삼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여러 실수가 있어도 하나님은 늘 다윗과 함께 계셨고, 다윗이 왕이 된 후에는 다윗 주변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셨습니다(7:1).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원리로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죄인은 죄의 사고방식을 쉽게 떨치지 못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전을 건축할 계획을 세웁니다. 하나님이 왕을 세운 것은 백성을 위한 것이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며, 다윗이 왕이 된 것은 백성위에 군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하나님으로 인한 평화와 안식과 자유와 행복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는 겸손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자기의 처소와 하나님의 궤가 처한 곳을 비교하기 전에 백성들이 사는 집들과 먼저 비교했어야 합니다. 만약 백성의 집이 초라한데 왕의 궁의 화려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왕의 역할을 망각한 것입니다. 성전을 짓겠다는 다윗의 의도는 이방의 왕과 같이 자신이 신의 인정을 받는 자임을 공포하고, 권위를 높이겠다는 욕심에 불과합니다.

 

2. 하나님의 처소

성전에 관한 하나님의 마음은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게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입니다. 하나님은 그 동안도 집에 거하지 않았는데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처소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휘장에 있으면 비천하고, 백향목 궁에 있으면 존귀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먼저 계시고 충분하시고 온전하신 분이요, 하나님 자신을 위하지 않고 인간을 위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식 속에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행할 수 있다는 생각이 가장 참람한 신성모독인 것입니다. 다윗의 왕위는 다윗의 생각처럼 보장된 것이 아닙니다. 나라가 안정되고 번성해지니까 심적으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미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준비도 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다윗이 왕이 된 모든 과정이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 것이지 다윗이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만약 다윗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다면, 다른 말로 은혜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원리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중단하시면 다윗은 사울과 똑같은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이룬 나라의 모습을 통해 안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평화를 누리고, 더욱 하나님의 원리를 순종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짓겠다는 마음은 교만이요, 자신의 왕위가 계속될 것이라는 자신감과 나라의 경제적 풍요가 이어질 것이라는 자만심의 표출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집을 지어드릴 만큼의 국가적 능력이 갖추어졌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보장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3. 인간을 위한 하나님

다윗이 하나님을 향하여 전을 건축할 계획을 세우자 하나님은 금하시고 도리어 다윗언약으로 알려진 약속을 선언하십니다(7:8~16). 하나님은 그동안 다윗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언급하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도우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강조점은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한 처소를 지어드리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다윗을 향하여 약속하시는 내용은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7:11) 즉 인간의 행복과 안녕입니다. 지금까지의 평안도 하나님이 이루셨고(7:1) 앞으로의 평안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위치, 어떤 신분, 어떤 부유, 어떤 번영을 약속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안전, 인간의 평안, 인간과의 동행을 강조하십니다. 이때에도 다윗에게 요구하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특정인을 위한, 특정 신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후일에 여로보암과 예후를 왕으로 세울 때에 유사한 내용을 선언하십니다. 다윗을 향한 이 약속은 성도를 향한 약속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죄로부터의 자유, 하나님의 모든 풍성한 행복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4. 다윗의 기도

하나님의 약속을 들은 다윗은 깜짝 놀랐습니다. 다윗의 속셈을 알아차린 하나님께서 책망을 하지 않고 도리어 신실하게 일하실 것을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반응이 ‘주 여호와 이것이 사람의 법입니까?’ 즉 사람이 행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감사하며 이스라엘이 받은 은혜에 감격하며 여호와께서 더더욱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실 것’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자는 감히 하나님을 위한 어떤 다짐을 운운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게 됩니다. 오직 긍휼과 인애와 자비로 인간을 설득시키고 기어코 인간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의지의 반응을 이끌어 내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Ⅲ.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삼하 8~10장)

 

1. 정의와 공의를 행할 새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대로 다윗을 도와주십니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셔서(8:6, 14) 블레셋 사람들(8:1), 모압(8:2), 소바 왕 하닷에셀(8:3), 다메섹의 아람 사람(8:6), 하맛 왕 도이(8:9), 에돔(8:13)을 이겼습니다. 성경이 강조하려는 다윗의 행위는 법궤를 옮긴 것이나 성전을 지으려는 계획이 아니라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 새’입니다(8:15). 하나님이 다윗의 원수를 물리쳐주신 이유도 다윗으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죄인은 자신이 안정되지 못하면 남을 돌아보지 못하고, 자신의 풍족함을 인식하지 못하면 절대로 타인을 향한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죄인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한 자신의 평화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 때에만 하나님의 마음과 뜻과 원리로 행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행위를 통해 백성이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성전을 짓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2. 은총을 베풀리라

성경이 소개하는 또 하나의 다윗의 모습이 사울의 집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입니다(9:1, 3). 다윗은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의 경쟁에서 이겼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흡수하였기에 사울의 유족들은 다윗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찾을 때에 시바도 ‘당신의 종이니이다’(9:2), 므비보셋도 ‘당신의 종이니이다’(9:6), ‘죽은 개 같은 나’(9:8)라고 몸을 사립니다. 사울의 후손으로 다윗에게 정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어 사울의 모든 소유를 돌려주고 다윗의 상에게 먹게 하는 것은 오직 다윗 자신이 여호와께 은혜를 받은 자임을 깨달은 결과입니다.

더 나아가 다윗은 암몬의 아들 하눈에게도 은총을 베풀어줍니다. 만약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정치적 외교에 의지하려 한다면 불신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총을 나누고, 하나님의 평화를 나누는 목적이라면 이것이 다윗의 역할, 이스라엘의 역할입니다. 사울의 제사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대신 형식일 뿐이었고 솔로몬의 외교도 하나님을 인정하는 대신 자체 방어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제사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예배였고 다윗의 외교는 전도요 선교와 사랑의 나눔이었습니다.

 

3.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암몬 자손의 관리들은 다윗의 은총을 의심하였고, 주변의 왕들과 연합하여 33,000명을 동원했습니다. 이때 요압이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합니다(10:12). 왕이 하나님의 원리로 행동하매 장수도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요압과 군사들이 나아가매 아람 사람이 도망하고, 이어 암몬 자손도 도망하고, 아람과의 전쟁에서도 아람이 도망하여 쉽게 승리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을 쳐들어온 왕들이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니’가 됩니다. 이스라엘의 평화는 다윗의 군사적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의 결과입니다. 한 장수의 용맹함이나 한 번의 승리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들어내신 다윗의 모습은 강력한 왕이 아니라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사람, 은총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 만들어 내신 모습은 강력한 나라가 아니라 화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해 온 백성과 온 열방이 평화를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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