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강해설교와 각종 성경공부 모임입니다.

조회 수 2543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제 3 강 사무엘하 11 ~ 14 장

 

Ⅰ. 죄인의 치밀함 (삼하 11장)

 

1.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여 왕으로 기름부은 궁극적 목적은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8:15)과 ‘은총을 베푸는 것’(9:1, 10:2)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선택하신 목적도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는 것’(창18:19)이었고, 인간에게 기대하시는 것도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6:8),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않는 것’(슥8:17), ‘서로 사랑하라’(요:13:34)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때 인간이 서로 자유와 평화와 안식과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삼상16~삼하10장). 다윗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알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여 평안을 누리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2. 죄인의 음모

죄가 죄인을 충동질하여 모든 상황을 죄적으로 인식하고 판단하도록 만들기에 죄인은 자족할 줄 모르고, 평안을 누릴 줄 모릅니다. 하나님이 평안을 주셨을 때 다윗은 왕궁 옥상에서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 난 후 즉흥적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여인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았고, 지금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를 모두 알아보았습니다(11:4). 자기 부하 장수인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인 것이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여인을 취하고 결국 아내로 삼는 것은 우발적 행동의 연속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미 결론을 가지고 행동한 것입니다. 우리아는 다윗의 부하 장수였지만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헷 사람 즉 가나안에 살던 원주민으로 외국인 용병 장수였습니다. 다윗은 우리아가 비록 자신의 부하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이기에 용병으로서 활용했고, 장수의 위치를 부여한 것만도 많이 대우해 준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죄를 짓는다는 개념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죄가 주인이고 죄인이 죄의 종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의 마음으로 시작하면 결국은 죄의 목적이 완성될 때까지 끌려갑니다. 이때 죄를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없거나, 하나님의 도움이 없다면 결국 죄인은 죄의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우리야, 밧세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왕 다윗의 본분을 망각한 악질적인 행동과는 다르게 이방인 헷 사람 우리아는 장수로서 본분에 충실하여 전장에서 후방으로 복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가지 아니하고 부하들과 더불어 잡니다. 장소와 관계없이 전쟁 중인 동료들과 한마음 한뜻으로 행동한 것입니다(11:11). 다윗은 자신의 죄악을 감추려고 우리아를 복귀시키고, 술에 취하게 하여 억지로 집에 보내고, 마침내 전장에서 살해당하도록 지시를 합니다. 본인은 죄를 지었고, 본인의 죄를 감추기 위하여 무고한 자를 살해하고, 다른 사람을 자신의 죄악에 끌어들이고, 전쟁 중에 장수를 살해함으로 전쟁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망설이지 않습니다. 졸지에 다윗에게 끌려온 밧세바도 다윗과 동침한 후 부정해진 몸을 씻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다윗과 우리아, 밧세바 중에 다윗만 죄를 모르고, 거듭 죄를 짓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왜곡되면 종교인은 엉뚱한 당위성을 가지고 이방인보다 못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Ⅱ. 여호와를 업신여기고 (삼하 12장)

 

1.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은 다윗을 강한 왕, 큰 나라의 왕, 부유한 왕으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다윗 스스로 덕을 쌓고 수양을 한 것이 아닙니다. 왕이라는 신분이 다윗의 행동을 거룩하게 만들지 못하고, 부유함과 강성함이 다윗을 성결하게 만들지 못했고, 건강과 경륜이 다윗을 의롭게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계시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백성의 모습으로 다윗을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죄인은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이 다윗을 통해 확인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변화된 행동에 놀랄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깨닫는 것이며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모든 인간이 다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뿐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문제를 ‘죄’라고 선언하고, 죄를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온전하게 계시를 하시지만 죄인은 하나님을 배우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잠깐 하나님을 경험하지만 바로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라 죄인의 한계입니다.

 

2. 여호와를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심정, 하나님의 원리 더 나아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신뢰하느냐의 여부입니다. 나단을 통하여 다윗을 책망하는 주제는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입니다(12:8). 즉 다윗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할 줄 모르고 자신의 욕망을 채웠다는 것으로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 것이기에 다윗의 죄는 음행이 아니라 하나님을 업신여긴 것입니다. ‘업신여기다’는 ‘멸시하다, 싫어하다, 경멸하다, 삼가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다윗은 매사에 하나님께 질문하고 의지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사울로부터 보호할만한 세력이 없었고, 블레셋에 대항할 힘이 ㅇ벗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왕으로서 자신의 위치가 견고해지자 여호와의 말씀을 무가치한 것으로, 따라야할 이유가 없는 것으로, 귀찮은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윗의 행동만 주목할 뿐 다윗의 의도를 모르기에 다윗이 ‘은밀히 행하였으나’이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속내를 모두 알고 계십니다.

 

3. 여호와의 원수

다윗은 이미 여호와를 업신여기고 있었기에 본인이 죄를 짓는다는 생각이 없었으며, 나단을 통한 하나님의 책망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장차 임할 죄의 결과를 염려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판단과 조치는 언제나 본질적이고 근본적입니다. 만약 다윗의 간음에 해당하는 부분만을 징계한다면 여전히 죄의 마음이 있기에 다른 부분에서 또 다른 양상의 죄가 발생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행하지 않은 것,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것을 지적하심으로 이후의 모든 행동에서 하나님의 원리로 행동할 수 있도록 원천적으로 지도하시는 것입니다. 나단이 지적한 것은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입니다(12:14). 성도의 적은 죄이고, 성도가 두려워해야하는 대상은 죄입니다. 죄인이 반성하고, 다짐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4. 여호와의 은혜

죄는 죄의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특별히 내리시는 징계는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반드시 아이를 죽게 하시지도 않습니다. 죄의 결과는 아기가 죽은 것이 아니라 아기의 죽음으로 인해 다윗에게 슬픔과 아픔이 임한 것입니다. 다윗의 행동은 일시적, 우발적 행동이 아니기에 이후에도 원수에게 비방거리가 될 만한 많은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의 청원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하나님께서 아이를 죽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더 큰 화가 임하지 않도록 다윗을 도와주신 것입니다.

 

 

Ⅲ. 이스라엘에서 행치 못할 것 (삼하 13~14장)

 

1. 죄의 영향력

다윗의 범죄는 하나님을 업신여긴 근본 상태에 관련된 것으로 이후의 여러 사건들에서도 하나님의 왕의 모습이 아니라 평범한 정치적 왕의 모습으로 행동할 뿐입니다. 왕은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는 말씀을 불순종하고 많은 아내를 둔 결과 자녀들간의 불화가 발생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하지 못할 어리석은 일이(13:12) 다윗의 가정에서 암논에 의해 다말에게 발생하고, 이어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하게 됩니다. 다윗이 경건한 모범을 보이지 않았기에 동일한 유형의 죄가 자식들에게서 발생하였습니다. 어디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오직 죄의 욕망, 죄의 원리에 따른 보복만이 넘쳐납니다. 신앙은 한순간에 길러지지 않고 죄성은 한순간에 물러가지 않습니다.

 

2. 부전자전 = 죄전(罪傳)

다윗의 행동은 하나님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분명히 암논은 죄를 행하였고, 압살롬은 형제 암논을 살해하였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로 인하여 우리아에게 행한 행동이나 압살롬이 다말로 인하여 암논에게 행한 것이다 다 동일한 원리입니다. 다윗이나 암논이나 압살롬 모두 우발적 행동이 아니라 죄의 치밀함과 교활함을 가지고 행동한 것입니다. 다윗은 암논의 죄에 대하여도, 압살롬의 죄에 대하여도 어떠한 책망도 가르침도 없이 그냥 묵과해버렸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죄인을 책망하거나 꾸짖지 아니하시고 은혜로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방관하고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동이 죄인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과 계시가 동반됩니다. 죄에 대해 죄의 원리로 징계하는 것이나 묵인하는 것은 절대로 죄인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자녀들의 범죄에 대해 아마도 다윗은 자신이 권고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대하신 것은 죄책감에 의한 무기력함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은혜를 근거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신분이나 자격을 근거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근거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3. 부끄러운 지도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다윗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일하심을 증거하며 가르쳐야 하는 역할을 행해야 했습니다. 이 역할을 위해 하나님은 계속하여 다윗을 부르시고 약속하시고 도우시고 약속을 이루어주셨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려도 오직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백성을 설득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행하지 못할 일을 한 장본인이 다윗이고, 다윗의 가정이고, 백성을 가르쳐야 할 왕이 드고아 여인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행여라도 신하들이 압살롬을 죽이고자 간헌할 때에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14:14)라고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에 근거하여 호소했어야 합니다. 자기 아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이 일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계기로 삼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왕이 아니라 평범한 여인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가르치실 수 있습니다.

 

4, 동역자

요압은 다윗의 개국공신이자, 킹메이커요 비서실장이자 경호실장, 가족 담당 민정 수석의 역할을 합니다. 다윗의 생애에 기여한 요압의 역할은 가히 놀랄 만합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다니다 사울을 죽일 기회가 왔을 때 정당한 명분을 주어 사울을 죽일 것을 독려했던 사람이고, 수많은 전쟁에서 다윗을 위해 싸웠으며, 다른 성을 함락할 때도 결정적인 순간에 다윗을 초청하여 다윗의 승리로 만들어 주었으며, 다윗과 압살롬의 갈등 때 화해를 시켰으며, 반란 때에 다윗을 지켜 주며, 인구 조사 때에 강력하게 만류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압의 동역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철저하게 왕권에 대한 동역이었습니다. 다윗이 영향력이 약해지자 아도니야의 반역에 동참하였고 결국 솔로몬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왕상2:34). 성도에게는 이루어야할 과업이 없기에 사역을 목적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신앙, 하나님의 마음으로 동역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은 대부분 별다른 업적이 없고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뿐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사역에 동역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SCROLL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