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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와 각종 성경공부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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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강 사사기 17 ~ 21 장

 

Ⅰ. 변질된 종교 (삿 17~18장)

 

1. 이스라엘의 사사들

사사

성경

이스라엘의 범죄

고난기간

통치

이방

지파

옷니엘

삿 3:9-11

악행

8

40

메소포타미아

유다

에훗

3:12-30

악행

18

80

모압

베냐민

삼갈

3:31

악행

 

 

블레셋

납달리

드보라

4:4-5:31

악행

20

40

가나안

에브라임

기드온

6:11-8:35

악행

7

40

미디안

므낫세

아비멜렉

9:1-57

바알신 공경

 

3

 

므낫세

돌라

10:1-2

 

 

23

 

잇사갈

야일

10:3-5

 

 

22

 

길르앗

입다

11:1-12:7

이방신 공경

18

6

암몬

길르앗

입산

12:8-10

 

 

7

 

유다?

엘론

12:11-12

 

 

10

 

스블론

압돈

12:13-15

 

 

8

 

에브라임

삼손

13:2-16:3

악행

40

20

 

 

2. 왜곡된 신관

가나안을 정복한 세대의 사람들은 다 그 죽었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했습니다(삿 2:10). 그 후 대략 200~300년이 지내는 동안 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세워 이스라엘에게 해방과 평온함을 허락하셨지만 이스라엘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 상태를 지적하여 위하여 백성들의 모습과 특히 여호와 신앙의 상징인 레위인의 모습을 소개해줍니다. 미가는 자기 어머니의 은을 가졌다가 도로 돌려주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하여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고 합니다(17:3). 이스라엘 가운데 은상색이 있었고 신상을 만드는 것이 횡횡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신당이 만들어지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세상 종교는 신의 형상이 만들어지는 것에서 시작하여 제도화, 형식과, 조직화, 수단화됩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토라와는 아무 상관없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있습니다(17:6). 이것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과 교통하는 방식이 전혀 아닙니다. 우상숭배 금지나 형상 금지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변질된 종교는 인간이 먼저 신을 위하고 신의 은총을 받으려는 양식입니다.

 

3. 왜곡된 사역관

레위인에게는 각 지파별로 성읍이 주어졌습니다. 레위인은 자생할 수 있는 기업이 없이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공급받아 살아가게 되어있습니다. 레위인이 거류할 곳을 찾아다니는 것은(17:9) 백성들이 공궤하지 않았음을 의미하고, 이것은 백성들이 여호와 신앙을 버렸음을 의미합니다. 미가는 이미 마련된 신상과 신당에 걸맞는 공적 제사장을 세울 좋은 기회로 여겨 레위인을 자기 집안의 제사장이 될 것을 제안했고 레위인이 동의했습니다. 미가는 종교 양식이 갖추어졌다고 여겨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레위인은 여호와에 의해 구별되었고, 제사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위해 제정해 주신 직분이며, 백성들의 신앙을 계도해야할 역할을 맡았습니다. 레위인은 미가의 집에서 분명 여호와 신앙과 무관한 우상 신상과 종교 양식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레위인은 생존을 위하여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미가의 우상종교를 위한 제사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미가보다 레위인의 불신앙이 더욱 심각한 것이 이스라엘의 종교 현실입니다.

 

4. 왜곡된 가치관

단 자손이 미가의 집에 이르러 제사장을 만나 자신들의 행보에 대해 하나님께 물어 볼 것을 요청하고 제사장은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고 대답합니다(18:6). 이미 미가와 제사장의 종교 양태를 알고 있기에 이 장면은 여호와 신앙적 방식이 아니라 우상적 방식에 불과합니다. 후일에 단 지파는 다시 미가의 집으로 돌아와 새긴 신상와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강탈하며 제사장에게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18:19)고 묻고 제사장은 기뻐하며 단 지파를 따라갑니다. 미가도 에브라임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이고, 레위인은 베들레헴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고, 단 지파도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단 지파를 막아서는 미가에게 단 지파 사람들은 ‘노한 자들이 너희를 쳐서 네 생명과 네 가족의 생명을 읽게 할까 하노라’고 위협하고 미가는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돌이켜 집으로 돌아갔더라’입니다. 어디에도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개념이 없고, 여호와 신앙이 없고, 강자와 약자의 가치관, 크고 작음의 가치관만이 있을 뿐입니다.

 

5. 어리석은 고백

단 지파가 거주지를 찾던 중 라이스에 이르러 거기 있는 백성들을 보고 한 말이 “염려 없이 거주하며 시돈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평온하며 안전하니 그 땅에는 부족한 것이 없으며 부를 누리며 시돈 사람들과 거리가 멀고 어떤 사람과도 상종하지 아니함이라”(18:7), “너희가 가면 평화로운 백성을 만날 것이요 그 땅은 넓고 그 곳에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으니라”(18:10)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허락하신 축복된 삶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이 삶을 살아 이방인들로부터 이 고백을 들었어야 합니다. 단 지파가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사는 백성을 만나 칼칼라 그들을 치며 그 성읍들을 불사르되 그들을 구원할 자가 없어서’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자신들이 그 땅을 빼앗았다면 자신들도 그 땅을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단 지파는 여호와 대신 미가가 만든 신상과 제사장을 세웠습니다. 비록 본문에는 단 지파의 다음 장면이 없지만 그곳에서 행복을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6. 죄인의 한계

여호와 신앙은 하나님이 완성하시어 은혜를 주시는 복락을 누리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행하신 것이요 인간의 영향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가의 어머니, 단 지파, 레위인 등 모두 인간의 능력, 인간의 영향력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성도는 사역자를 의지하지 않는 것이요, 사역자는 성도를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오직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18:1, 19:1, 21:15)이지만 이스라엘에는 왕이 있었고 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토라가 이스라엘이 따라야 할 소견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 충분하고 하나님의 토라대로 살면 이스라엘은 평안한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사시대 내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순종치 않았고 율법대로가 아니라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원리가 너무 죄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자유를 원하면서도 어딘가에 속박당하기를 원합니다. 죄인은 자아를 강조하면서도 타자에게 의지하려고 합니다. 죄인은 제도나 형식을 거부하면서 또 다른 조직을 만듭니다. 죄인은 행복을 얻으려 노력하면서 주어진 행복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Ⅱ. 변질된 신앙인 (삿 19~21장)

 

1. 인간을 살리는 신앙, 인간을 죽이는 종교

종교는 연약한 인간이 자신을 안위하기 위하여 스스로 타자에게 의지하는 행위입니다. 모든 종교는 절대적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종교인에게 상대적 가치를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상호간에 비방할 수 없고 자신의 종교를 남에게 강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앙은 죄인 된 인간을 도우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의지하게 하거나, 하나님의 원리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시며 인간을 도우시고, 인간의 하나님께 기댐을 수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이렇게 대하시듯 성도는 타인을 정죄하거나, 배타적이 되거나, 판단하거나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2. 변질된 기준

어떤 레위 사람이 첩을 두었고 처가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머물렀습니다. 유숙할 곳을 찾던 중 한 노인의 집에 머물렀고 비류들이 와서 상관하겠다고 협박하자 노인은 자신의 처녀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어 주려고 합니다. 결국 레위인이 자신의 첩을 내어주고 결국 그 여인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때 노인의 말이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19:24)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망령된 일입니까? 처녀 딸과 첩은 기꺼이 스스로 내어 주는 사람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기꺼이 자신 대신에 자신의 첩을 내보내는 레위인의 삶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기준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손해 보는 사람, 억울한 사정이 발생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인간의 처지와 상황이 각양각색이면서도 하나님의 기준이 절대 진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이미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사람들이 기준을 변화시키는 이유는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유익하고, 나아질 것을 취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죄적입니다.

 

3. 변질된 적용

하나님의 원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시어 인간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이 그 원리대로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리의 선함과 의로움이 증명되지 않고는 아무도 순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레위인이 선과 악을 말하고 망령된 행실을 언급하려면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원칙에 충실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레위인은 자신은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백성들에게는 악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항변합니다. 악행은 언제나 더 큰 악을 부릅니다. 레위인은 이미 죽은 첩의 시신을 열두 토막으로 분해하여 각 지파에게 보냈습니다. 모든 지파가 흥분하는 이유는 자신의 죄를 감출 수 있고, 자신의 의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성도들은 죄인을 덮어 줄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지만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는 죄인들은 타인을 죄인삼음으로 자신의 돌파구를 찾는 것입니다.

 

4. 가장 무서운 것

이스라엘은 이방의 침임으로 인해 오랫동안 압제를 받았고 그 때마다 하나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방으로 인한 고통은 겨우 경제적 어려움뿐이었습니다. 레위인에 의해 야기된 민족의 갈등은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범죄의 모습 속에 살면서 서로 간에 자기의 의를 주장하며 심판자를 자처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동족상잔의 전쟁에 빠지고 이스라엘 40만 명과 베냐민 26000명이 3차에 걸친 전쟁을 통해 서로 간에 십여만 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행복은 하나님께 있는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결과는 내외적인 갈등과 분열과 불행뿐입니다. 어떤 외부적 침입도 없었는데 갑자기 죄의 기준이 적용되고, 죄의 심리가 작동하자 서로가 대적이 되고, 서로가 살육을 행했습니다. 모두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일입니다. 애초에 하나님을 따르지 않으면서 전쟁에서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 갑자기 하나님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를 묻습니다(20:18, 23, 28). 하나님께 같은 민족을 죽일 것에 대해 묻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인간의 삶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가난이 아니요, 질병이 아니요, 사회적 구조가 아니요 죄입니다. 하나님은 이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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