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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와 각종 성경공부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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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강 룻 기 1 ~ 4 장

 

Ⅰ.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 (룻 1장)

 

1. 엘리멜렉의 선택

사사기 마지막 부분(삿 17~21)부터 룻기와 사무엘상 전반부(삼상 1~2장)에 사사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모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엘리멜렉은 베들레헴 사람으로 부자였습니다(룻1:21). 흉년이 들자 백성들을 버리고, 약속의 땅을 버리고, 여호와를 버리고 온 가족이 이방지역인 모압으로 이주하였습니다. 모압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통과할 때 모압의 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고(민 22장), 싯딤에서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고 우상을 섬겨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민 25장). 엘리멜렉은 단순히 기근을 피하여 이주한 정도에 그치지 않고 두 아들을 위해 모압 여인을 아내로 맞이함으로 모압과 연합하고, 모압의 종교를 섬겼습니다.

 

2. 하나님이 왕이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리거나, 양식을 찾아 이방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은 모두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사시대의 특징인 ‘제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돌보고 책임지는 ‘왕’, 따르고 준수할 만한 ‘왕의 소견’이 없다고 간주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과 광야와 가나안 입성을 이루어주신 것을 은혜로 생각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토라를 ‘하나님의 소견’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지 않으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보장, 하나님의 신실성은 온데간데없고 기근이라는 현상이 가장 위험한 문제로 인식되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돌보사 양식을 주셨습니다(1:6). 기근은 하나님의 무능력이나 무책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스라엘의 ‘왕’의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하십니다.

 

3. 나오미의 권고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신앙의 모습을 만날 수 없습니다. 나오미는 양식을 찾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1:13), 여호와께서 자신을 비어 돌아오도록 징벌하셨고 괴롭게 하셨다고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1:21). 말끝마다 ‘여호와’, ‘전능자’를 언급하지만 어디에도 여호와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모습이 없습니다. 본인도 남편을 잃었고 두 며느리도 남편을 잃었는데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오르바와 룻에게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기’를 원하며 떼어 놓으려 합니다. 오르바가 떠난 것이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 돌아간 것’(1:15)임을 알고 있기에 룻에게 떠날 것을 종용하는 것도 ‘그의 신들에게 돌아갈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기에 여호와를 가르치는 자도 배우는 자도 없습니다.

 

 

Ⅱ. 여자들과 남자들 (룻 2장)

 

1. 여자들

나오미와 유대에 남은 사람은 비교 대상이 아니며 누가 더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오르바와 룻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며, 누가 더 잘한 것이 아닙니다. 떠나는 오르바도 남는 룻도 모두 자신의 처지에 맞게 행동하였을 뿐입니다. 나오미를 따르기로 결심하는 룻의 결심은 신앙의 고백이기보다는 오갈 데 없는 여인의 절규입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에게 신앙의 모습이 없기에 룻이 여호와 신앙을 배울 곳이 없었기에 룻에 대해 여호와 신앙을 언급할 수 없습니다. 어디에도 룻의 신실한 믿음이나 하나님께 복을 받을 만한 충성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나오미가 돌아올 때 온 성읍이 ‘이이가 나오미냐?’고 합니다(1:19). ‘나오미’는 희락이라는 뜻입니다. 부자일 때 자신들을 버리고 떠난 나오미가 남편과 자식과 재산을 잃고 패망하여 달랑 본인과 룻만이 돌아오기에 마음껏 조롱하는 것입니다. 이미 체념한 듯 나오미도 스스로를 괴로움이라는 뜻의 ‘마라’로 부르라고 합니다.

 

2. 기업 무를 자들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면 ‘남편을 두어 며느리들에게 기업을 무르게 해야 함’(1:11)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고향에 돌아온 나오미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습니다. 또한 나오미에게 기업을 물러 주어야 할 친족 남자와 보아스도 나오미와 룻이 귀향한 것을 알았지만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고 일체의 책임있는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2:11). 구체적으로 사건이 진행되자 기업 무를 우선권이 있는 사람은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고 합니다(4:6). 경제적 손실이 아까워 백성을 버렸던 나오미 가족이 경제적 손실을 이유로 백성들에 의해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나중에 보아스가 기업 무르는 과정에 중인이 되는 장로들도 먼저 나서서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아 주는 사역을 행하지 않습니다. 외형적으로는 기업을 무르는 것과 관련된 율법의 제도가 시행되고 있으니 어디에도 여호와의 마음이 없습니다.

 

3. 남자들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으로 돌아온(1:22) 나오미와 룻은 생존을 위해 룻이 이삭을 줏으러 나갔습니다.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고 사환들에게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2:7) 요청하였으나 사환들은 허락하지 않아 아침부터 계속 간청하며 서 있습니다. 아마도 주인도 허락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방인 여자에게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때 보아스가 밭을 방문하여 상황을 목격하고 룻을 만나게 됩니다. 그 동안 룻에 대한 소문을 들었음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보아스가 룻을 만난 이후로는 돌변하여 마실 것을 제공하고, 사환들에게 룻을 간섭하지 않도록 명하고, 식사 때에 음식을 나누어 주고, 룻이 많은 이삭을 주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줍니다. 물론 보아스가 매우 신앙적인 말을 하지만(2:12) 과연 신앙적 고백인지 의혹이 듭니다. 룻에 대해 선처를 하면서도 자신의 친족인 나오미에 대해서는 안부조차 묻지 않습니다.

 

 

Ⅲ. 사람의 일, 하나님의 일 (룻 3~4장)

 

1. 나오미의 전략

룻에게서 보아스에 대한 소식을 들은 나오미는 즉시 전략을 짭니다. 나오미가 룻이 여호와에게 복 받기를 원했으면,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 중의 하나인 것을 알았다면(2:20), 룻을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복되게 하려고 했다면(3:1) 보아스를 찾아가서 기업을 물러달라고 요청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고 말하며(2:22),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고(3:5) 합니다. 아마도 나오미는 기업을 무를 자 중에 보아스 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3:12). 다만 보아스에게 더 마음이 끌려 의도적으로 보아스에게 접근하여 모략을 꾸며낸 것입니다. 어쩌면 남자들의 속성을 알기에 룻에게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3:18).

 

2. 보아스의 전략

룻을 만나 선처를 베풀었던 보아스는 룻의 도발적인 행동에 놀랐으나 룻을 자기에게 보낸 나오미의 의도를 알아 차렸습니다. 나오미가 직접 기업을 무를 요청을 해 왔으면 모른척 했을텐데 천만다행으로 룻을 보냈기에 기꺼이 룻을 위해 기업을 무를 준비를 합니다. 성읍 장로들과 기업 무를 우선권이 있는 자를 불러 룻이 아닌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한다’고 말하고, 그가 기업을 무를 의향을 보이자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고 부담을 줍니다(4:3, 5). 결국 보아스가 기업을 무르게 되자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것’과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를 선포합니다. 나오미와 보아스의 전략이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습니다.

 

3. 하나님의 은혜

엘리멜렉이 베들레헴을 떠나는 순간부터 나오미와 룻이 돌아오고 룻이 보아스의 아내가 될 때까지 여호와는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양식을 주신 것 이외에는 사역하는 모습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룻이 보아스의 아내가 되자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어 아들을 낳게’ 하십니다(4:13). 이후에 룻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여호와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룻의 삶은 평안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후에야 이스라엘 사람들의 태도가 변합니다.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나와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업게 하지 아니하셨도다’고(4:14) 말하고 나오미의 회복을 축하하고 장래를 축복합니다.

 

 

Ⅳ. 이스라엘의 하나님

 

1. 제 소견에 옳은 대로

룻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은 모두 자신의 처지와 상황에 맞게 행동했습니다. 더 악한 사람도, 더 선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범이 되는 사람도, 비난을 받을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모두가 하나님과 무관하게, 철저하게 죄의 원리를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오늘도 매일 같이 일어납니다. 살아가는 중에 이런저런 불편한 상황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 만약 하나님의 원리를 따라 행동했다면 처음부터 모든 상황이 룻기와는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매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 처세술입니다. 물론 인간은 변화되는 상황에 적응해야 하기에 모든 상황에 어울리는 원리를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죄인의 소견은 죄적일 수밖에 없으며, 죄의 원리는 죄의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원리, 죄의 원리가 인간에게 행복을 주지 못한 것이 인류 역사의 결론입니다.

 

2. 하나님의 소견

하나님의 토라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며, 인간의 삶을 도외시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토라는 온전히 모든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삶의 원리입니다. 인간이 토라에 따라 살 때에 하나님이 좋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좋은 것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위하는 종교적 이기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윤리적이며, 사상이나 이론을 중시하는 철학적 이기보다 인간의 삶에 구체적으로 연결된 실제적이며, 인간의 행동에 근거하여 신이 보상하는 공로주의 이기보다 하나님이 인간의 필요를 아시고 먼저 필요를 채워주시는 은혜주의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섬겨 주는 듯한 태도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기꺼이 따르는 것입니다.

 

3. 계시적 사건

나오미, 룻, 보아스가 특별히 받은 축복이란 없습니다. 결혼을 하고, 손자를 얻었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이 이미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성경은 한 사람 보아스를 부각시키거나, 한 고부간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고 이방을 의지하려고 가는 사람에게도 태를 열어주어 기업을 잇게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의 본분 됨을 망각하고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에게도 간섭하시고 직접 인도하셔서 신앙의 맥을 이어가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수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워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의 삶의 환경이 이방인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 때에 동일한 삶을 살면서도 삶의 대한 자세와 반응이 이방인과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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