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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와 각종 성경공부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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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강 사무엘상 1 ~ 6 장

 

Ⅰ. 하나님의 은혜 (삼상 1~3장)

 

1. 역기능 가정

하나님은 인간의 특정 시대에, 특정 지역에, 특정 인물에게 하나님을 계시하셨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인간의 문화 양식을 거부하시고 전혀 새로운 양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때 인간의 문화란 죄의 가치와 방식이고, 하나님이 죄의 문화를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외형적 문화 속에 새로운 하나님적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엘가나는 두 아내(한나, 브닌나)를 두었고 자녀도 있었지만 화목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여호와께서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1:5, 6)라고 기록되었지만 하나님은 한 개인의 삶을 곤궁으로 몰아넣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부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은혜를 주시기 위해 고난을 거치게 하고, 복을 주시기 위해 시련을 당하게 하시는 방식으로 인간을 대하시지 않습니다. 인간문제의 원인은 전적으로 인간 때문입니다. 한나가 임신하지 못한 것은 단지 한나의 건강상의 문제일 뿐입니다. 다면 성경은 한나가 얻게 될 아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수사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2. 역기능 종교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하나님은 먼저 인간의 필요를 아시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제시한 방법이 아니라 인간의 우상적인 종교 방식을 뿐입니다. 당시에 한나 이외에도 아들이 없는 자가 많았고, 한나 이외에도 자녀를 위해 각자의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한나가 기도했기 때문에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고, 어떤 사람은 예물을 드리고, 어떤 사람은 충성을 해서 응답을 받았다고 해서 각 사람이 행한 일이 응답받는 방법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을 돌아보시며 필요한 것을 공급하셨다는 은혜입니다. 한나는 아들을 낳은 후 또 기도하지만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께 감사하기보다는 자신의 한이 풀린 것에 대한 환호의 성격이 강할 뿐입니다. 기도나 기도하는 사람이 강조되면 안 되고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가 강조되어야 합니다.

 

3. 역기능 환경

한나는 자신이 아들을 얻고자 하는 소망 때문에 아들의 삶을 자신이 결정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삭도를 대지 않겠다고 서원해버립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인간을 사용하지 않으시는데 죄인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남의 삶을 이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나가 기도하지도 않았는데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해 주실 정도로 은혜를 주셨습니다(2:21). 반면에 사무엘은 부모의 돌봄이 필요한 시기인 젖 뗀 후인 어린시기에 부모로부터 떨어져 여호와의 집으로 보내집니다. 여호와의 집에 있는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쁘고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였고(2:17),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동침하기도 했고(2:22) 책망하는 아버지인 제사장 엘리의 훈계도 듣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의 주변 환경은 너무나도 열악했고 건강하고 바르게 성장하기에 너무나 많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4. 두 집안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에게 먼저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순종하면 계속하여 은혜를 누리고 불순종하면 은혜를 상실하게 됩니다. 엘리집안은 하나님의 은혜로 제사장이 되었으나 여호와를 존중히 여기지 않아 엘리는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고, 불량자인 두 아들은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2:35)라고 말씀하시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2:21),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2:26),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3:19),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3:21)와 같이 사무엘을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은 엘리와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Ⅱ. 왜곡된 종교 (삼상 4장)

 

1. 배우지 않는 신앙

인간이 죄인이 되어 죄적 사고방식으로 행하고, 죄적 종교양식으로 우상을 섬길 때에 하나님은 친히 죄인들을 찾아오셨고, 우상 신들과는 다른 하나님을 계시하셨고, 죄의 원리와는 다른 하나님의 원리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책임자이심을 선언하셨고, 인간의 삶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 상황마다 친히 하나님이 모든 영역과 기능의 주관자이심을 직접 경험하여 배우게 하셨습니다. 또한 인간이 상호간에 적용하면 모두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과 원리를 담은 토라를 제공하여 주셨습니다. 죄인에게 계시된 ‘여호와 신앙’은 죄의 원리와는 완벽하게 달랐습니다. 전적으로 인간에게 유익하였고, 결코 인간에게 어렵고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체의 인간의 수고와 희생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제공되었고,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하여 철저하게 보장되었습니다. 인간은 가장 쉽고, 가장 분명하고, 가장 유익한 하나님의 원리대로 행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풍성한 복락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배우지 않았습니다.

 

2. 배우는 종교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워 패하자 장로들은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패하게 하셨는고’라고 불평하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우리에게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게 구원하게 하자’고 제안합니다(4:3). 이것은 여호와 신앙과 무관한 전적으로 우상종교적 행동입니다. 블레셋은 신이 진영에 이른 것을 알고 자신들에게 화가 임하고 패할 것으로 예상하는 등 이러한 방식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는 신앙을 배우지 않고 도리어 우상들에게는 너무 쉽게 종교방식을 배웠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 법궤가 앞에 행하였고(수3:14~17),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법궤가 앞에 행한 적이 있습니다(수5:12~13). 하지만 전쟁과 관련하여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이 이방민족에게 수차례 압제를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법궤를 비롯한 종교 기물을 사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법궤를 옮기자는 생각대신 여호와께 구원자를 보내달라고 부탁하자고 제안했어야 하는데 이미 죄의 종교에 익숙해져서 죄의 종교양식을 따를 뿐입니다.

 

3. 괘멸된 종교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종교는 완전히 괘멸됩니다. 비록 여호와를 버리고 떠나기는 했으나 실로에 여호와의 전이나 집도 있고(1:9, 24), 제사장도 있고(1:9), 장로들도 있고(4:3), 제사도 시행되고(1:3, 2:13), 여호와의 궤도 있었는데(4:3) 여호와의 이미 멸시당하고 있었고(2:17),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4:11), 제사장 엘리와 두 아들은 죽고(4:11, 18), 여호와의 영광은 이스라엘을 떠났고(4:22), 덩그러니 여호와의 전만 아무 의미 없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부터 사무엘이 등장하기 까지 이스라엘의 종교 실태입니다. 이스라엘의 행동에 근거하면 이스라엘에 여호와 신앙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이스라엘 자체가 생존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존재는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선언하셨던 하나님의 헌신적인 수고, 은혜에 근거할 뿐입니다.

 

 

Ⅲ. 이스라엘의 하나님 (삼상 5~6 장)

 

1. 신앙 or 종교

여호와 신앙은 여호와와 인간의 인격적 교제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능력자, 권세자가 아니고 이스라엘만 돕는 우상적 신(神이) 아닙니다. 여호와 신앙이 왜곡되고 변질된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나 심판이 아니라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존재’에는 무관하고 단지 ‘법궤의 존재’에만 집중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과 관련된 토라, 성막, 법궤, 절기, 제사장 등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은혜와 복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종교적 수단이나 방법이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전쟁에서 패하고 법궤를 빼앗긴 것은 하나님의 무능력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결과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패했을 뿐이지 여호와께서 우상 신에게 패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2. 순회하는 궤

전쟁터에서 너무나 무기력하게 블레셋으로 끌려간 법궤는 다곤의 신전에서 다곤을 엎드러지게 하고(5:3), 다곤의 머리와 손목이 끊어지게 합니다(5:4). 여호와께서 다곤 신전이 있는 아스돗 사람에게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치시매(5:6)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기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성읍에 더하사 성읍 사람들에게 독한 종기가 나게 하시고(5:9),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옮기고, 서로 궤를 떠넘기고 마침내 스스로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합니다. 궤가 블레셋 지역에 머무는 동안 궤가 스스로 능력을 나타낸 적이 없습니다. 궤는 단지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뿐이고, 궤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종교 행위나 종교 의식이나 종교 기물이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3. 살아난 블레셋

블레셋의 신 다곤은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블레셋 백성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많은 신을 섬기던 블레셋은 여호와를 섬기는 대신 궤를 돌려보내기로 합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신’이고, ‘패배한 신’이고, ‘형상과 수단이 없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기꺼이 신을 시험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소가 앞으로 나아가기에 불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한 후 소의 행보를 통해 자기들에게 임한 일이 ‘이스라엘 신의 소행인지, 우연인지’ 확인하려고 했고(6:9), 다른 한편으로는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한 금 독종을 드림으로 신의 은총을 구했습니다(6:4, 17). 블레셋 제사장들이 제안한 방식대로 행하여 궤가 안전하게(?)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후 ‘과연 제사장의 말대로 되었다’고 생각하고 더욱 블레셋 종교에 열심을 내었을 것입니다.

 

4. 죽는 이스라엘

여호와의 궤가 벧세메스에 도착하였을 때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제사를 드렸고(6:14),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6:19). 아마도 전쟁터에서 너무나 무기력하게 패한 궤가 금보물 담긴 상자와 함께 돌아오매 궤가 신비한 듯하여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블레셋은 법궤를 보냄으로 살아났는데 이스라엘은 법궤를 맞이함으로 죽는 아이러니입니다. 결국 여호와의 궤를 이스라엘에서도 서로 보관하기를 꺼려하는 위험물질 취급을 받았고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아비나답의 집에 두자 이스라엘 족속이 슬피 통곡하였습니다(6:19, 7:2). 사사기에서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보내셨던 것처럼,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준비시키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생존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법궤는 시내산에서 만들어졌고 요단강을 건넌 후 길갈에 안치되었다가 여리고 성을 돈후 길갈로 돌아왔고, 길갈이후 벧엘과 실로의 성전에 있다가, 블레셋과의 싸움을 위해 에벤에셀로 옮기고 빼앗긴 후 아스돗, 가드, 에글론으로 옮겨진 후 돌아와 벧세메스, 기랏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있다가 웃사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옮겨지고 솔로몬 성전에 놓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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