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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와 각종 성경공부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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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강 사사기 10 ~ 16 장

 

Ⅰ. 여호와의 근심 (삿 10장)

 

1.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삶이 평안하면 여호와를 버리고 떠나 우상을 섬기고, 삶이 곤고하면 하나님께 나아와 ‘우리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10:10, 15). 이스라엘은 삶이 곤고할 때에 당연히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에게 도움을 청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상은 이스라엘을 도와주지 않았고, 더 이상 도움을 청할 곳이 없을 때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호와께 돌아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날 때는 ‘여호와를 버리고’ 가지만,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는(3:9, 15, 4:3, 6:6, 10:10) ‘우상을 버리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 돌아오려는 의도는 없고 단지 위기를 모면하려는 수단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우신 것은 이스라엘의 속셈을 알면서도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지 않아도 먼저 구원자를 세워주기도 하십니다. 우상에게조차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인간의 곤고한 상황을 돌보아주는 하나님이 진정 이스라엘을 위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십니다.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10:13),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구원하게 하라’(10:14)는 계시 또는 교육을 위한 하나님의 표현일 뿐입니다.

 

2. 무익한 회개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예배, 찬양, 예물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는 이유는 영광을 받기 위함이 아니요, 다른 우상들과 경쟁하는 것도 아니요 오직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원리를 주시고 순종할 것을 기대하시는 이유도 하나님의 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요 오직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선택한 이유는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함’이요(창18:19), 율법을 주신 이유는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인간이 서로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원리대로 살지 않았다는 것이기에 이스라엘의 회개는 하나님께 나아와 우는 것으로가 아닌 자신의 삶의 원리를 바꾸는 것이어야 합니다. 여호와를 배움으로 삶의 가치와 기준이 바뀌지 않으면 당면한 상황을 모면한 후 여전히 죄의 방식으로 살아갈 것이기에 회개가 아니며,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회개를 보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은혜를 주시고 회개를 기대하십니다.

 

3.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하나님의 계시 사역이 완성되었는데 가나안에 정착하자마다 여호와를 버리고,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통하여 계시를 반복하여주셨지만 또 여호와를 버리고, 기껏 회개한다는 것이 ‘우리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이방신들을 버리매’(10:16)일뿐 도무지 여호와의 토라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신앙적 이해와 실천적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왜곡과 상황적 곤고에 대해 하나님이 마음에 근심하십니다. 여호와의 근심은 불안, 걱정, 염려, 진노가 아니라 안타까움, 민망해 함, 불쌍히 여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은혜와 복은 이미 다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태도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태도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대하듯 하나님을 대하는 죄의 논리에 대해 안타까워하시는 것입니다.

 

 

Ⅱ. 입다 (삿 11~12장)

 

1. 죄인의 대안

자신의 죄를 고백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는 대신 하나님의 교육을 위한 말씀을 거부 의사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대안을 세웁니다. 애초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올 의향, 하나님의 뜻대로 살 의지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섬겨주지 않으면 하나님은 인가에게 섬김도 받지 못하는 신으로 초라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만 무지할 뿐 죄의 원리에는 정확하고 철저합니다. 길르앗 백성들은 이미 야일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10:3), 암몬에 대항하여 서로 계획을 세우고 ‘먼저 싸움을 시작하는 자가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우리의 장관이 되라’,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고 거듭 제안을 하고,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고 확인을 합니다. 죄의 원리에는 공짜가 없고, 공로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습니다.

 

2. 죄인의 수준

이스라엘이 마련한 대안이 자신들의 형제이었으나 다른 여인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자신들이 쫓아내었던 입다였습니다. 입다는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하였고 잡류들이 모여들어 패거리를 이루고 살고 있던 처지였지만, 이스라엘의 관점에서는 자신들을 도울 수 있는 무리를 거느리고 있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죄의 원리는 오직 자신의 이익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자신들이 형제를 쫓아내었던 일에 대한 자책도 없고, 다시 그를 찾아가 도움을 청해야하는 비굴함도 없고, 입다와 그의 무리들에 대해 자신들이 사회의 악이라고 지칭하던 잡류라는 사실도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쫓아낼 때와 도움을 청할 때의 어떤 기준도 원칙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필요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죄인에게 원칙, 기준, 일관성, 공의를 기대하는 것은 죄인에 대해 모르는 것입니다.

 

3. 죄인의 수단

길르앗 장로들과 입다는 맹세를 하고 맹세의 보증인으로 여호와를 내세웁니다(11:10). 양쪽 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자신의 보호자요 인도자요 후원자로는 사용할 줄 모르면서, 맹세를 어겼을 경우 진노하는 자, 심판하는 자, 징계하는 자로서만 활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축복은 감격할 줄 모르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어지는 진노는 두려워하는 어리석음의 극치입니다. 입다는 자신이 전쟁에 나가 싸우기 전에 여호와께 도움을 청하기 위하여 서원을 하는데 그 내용이 만약 전쟁에서 이기면 자신을 맞으러 나오는 첫 사람을 여호와께 제물로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죄의 원리에는 합당할 수 있으나 여호와의 원리에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은 전혀 손해 볼 것이 없고, 환영나온 사람만 영문도 모른 채 당해야 하는 악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받고 상응하는 대가로 도움을 주시는 분이 절대로 아니며, 더군다나 여하한 이유로든 사람을 제물로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4. 죄인의 반응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선택하지 않고 끝까지 도움을 청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입다에게 여호와의 영을 임하게 하시고(11:29),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십니다(11:32).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명예가 소중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곤고함이 안타깝고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 소중합니다. 인간의 수준과 관계없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베풀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미련한 죄인은 평상시엔 그다지도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살다가 오직 자신의 서원은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입다의 승리를 하나님의 도우심의 결과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에브라임 지파들은 승리의 영예가 입다에게 돌아가는 것을 시기하여 시비를 걸고, 입다 또한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했다는 생각이 없기에 에브라임의 반응을 괘씸하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없기에 이방에 대해 승리한 이스라엘은 동족끼리 싸워 42,000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12:6). 과연 이방인이 무서운 적인가요 아니면 동족이 무서운 적일까요? 가장 무서운 상대는 죄입니다.

 

 

Ⅲ. 삼손 (삿 13~16장)

 

1. 은혜

이스라엘은 ‘또’,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했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주시니라’입니다(13:1). ‘여호와께서 파시매, 넘겨주시매’라는 표현은 거의 사사기에만 나올 뿐 사사시대와 동일하게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의 침입에 곤고함을 겪는 왕정 시대에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잉태를 못했고, 하나님께 자녀를 달라고 먼저 예물을 드리지도 않았고, 자녀를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먼저 마노아를 찾아오셨고, 하나님이 자녀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고(13:3), 그 아이가 장차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을 선언하셨습니다(13:5). 이미 장성한 어떤 사람을 세워도 되고, 지금 출생할 아이가 과연 장차 어떻게 성장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조건을 개의치 않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역 앞에 인간적인 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 원리에 대한 무지요,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모욕입니다.

 

2. 어리석은 삶

삼손은 하나님의 은혜로 출생하였고, 나실인으로 양육되었기에 자신의 삶에서 겪은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하나님의 나실인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나실인 답지 않은 행동만 합니다. 첫 번째 결혼은 블레셋여인과 하고 이로 인해 불필요한 많은 충돌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의 힘을 지극히 사적이고 아무 효과 없는 일에만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특정한 일에 한해서만 힘을 주신 것이 아니라 삼손의 개인의 일에 조차도 성령으로 감동을 주셔서 힘을 사용하여 곤란함을 극복하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힘으로 이스라엘에 태평이 오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불안과 곤고가 가중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삼손을 선택하신 것을 취소하거나, 삼손에게 주신 여호와의 영을 철회하지 않습니다. 삼손은 가사에 가서 기생에게 들어갔다가 죽을 위협에 빠지고 마침내 소렉 골짜기 여인 들릴라에게 미혹되어 자신의 힘을 상실하고 블레셋의 종이 되어 비참한 몰골을 하고 최후에 블레셋 무리와 자멸합니다. 들릴라에 의해 머리카락이 잘려나가 힘이 상실된 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징계가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것입니다.

 

3. 이스라엘의 자화상

성경은 삼손 이야기를 통해 한 개인의 삶을 넘어 이스라엘의 모습을 일깨워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백성이요, 온 땅에 하나님을 알리는 제사장됨의 역할을 전혀 감당치 못하고 스스로조차 생존하지 못하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이스라엘의 자화상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을 섬기는 블레셋은 삼손을 죽인 후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넘겨주었다’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며 즐거워하고, 자기들의 신을 찬양하며 마음이 즐거워합니다(16:23, 24). 삼손의 사역은 15:20절에서 한 번 언급되고 16장에서 다시 언급됩니다. 15장에서 이미 삼손의 역할이 끝이 난 것이고, 16장은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한 사람’의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4. 여호와를 아는 것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는 하나님의 출현과 약속을 의심하여 여호와를 시험하지만 여호와의 임재를 경험하고 ‘반드시 죽으리라’고 두려워합니다(13:22). 여호와를 만난 기쁨, 여호와의 약속에 대한 기대, 여호와가 주신 은혜에 대한 감격이 전혀 없습니다. 도리어 마노아의 부인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라고 하며 두려움이 없고, 약속대로 아들을 낳습니다. 물론 두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일하심을 몰라서(14:4), 삼손의 사역을 통해 아무도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12명 정도의 사사를 통해 200~400년간 은혜를 주셨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죄인의 한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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