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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와 각종 성경공부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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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강 창세기 34 ~ 38 장

 

Ⅰ. 노출된 위험 (창 34:1~31)

 

1. 인간의 삶의 정황

야곱은 고향을 떠나기 전에 형의 분노가 두려웠고(27:41), 외삼촌의 집에서는 외삼촌의 속임과 친척들의 시기에 시달렸습니다(31:1). 하나님의 은혜로 우여곡절 끝에 가나안 땅에 도착하였으나 또 다시 죄인들의 악행에 직면합니다. 세겜에서 자신의 장막을 위해 하몰의 아들들에게 값을 주고 땅을 구입하는 등 전혀 약탈이나 침탈자의 행동이 아니라 이주자로서의 삶의 안정을 추구하는 정상적 행동을 하였지만 불행히도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였습니다(34:2). 세겜은 디나를 연연하고 사랑하고 아내로 맞이할 마음으로 부모를 통해 야곱에게 혼인을 제안합니다. 심지어는 개인의 혼인을 위해 온 부족민이 할례를 받아야 하는 조건을 수용하기까지 합니다. 세겜의 행동은 죄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정착민의 이주민에 대한 강압적인 행동과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죄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2. 죄의 보복 원리

디나의 사건에 대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야곱과 다르게 아들들은 심히 노하고 세겜 사람들을 속여 할례 받게 한 후 시므온과 레위가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모든 남자를 죽이고 디나를 데려옵니다. 야곱의 네 명의 부인중에 레아에게서 난 딸 디나를 레아에게서 난 아들들이 구해온 것입니다(34:25). 가족 구성원 중에도 분열이 있었고, 심지어 야곱은 아들들이 자신에게 화를 끼쳐 죽음의 위기에 닥치게 했다고 원망할 정도였습니다(34:30). 세겜 사람들의 행동과 야곱 가족들의 행동이 모두 죄의 원리를 따를 뿐 다른 것이 없습니다. 도리어 야곱의 아들들은 디나의 사건을 세겜의 모든 남자를 죽이는, 몇 배나 심하게 갚아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등장하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는 조항은 죄에 상응하는 보복을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원한의 마음으로 부당하게 행동하면 안 된다는 권고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할 수 없는 것을 명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의인으로, 성도로 변화시켜 주시면 성도가 하나님의 마음과 심정과 원리로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Ⅱ. 하나님의 적절한 권고 (창 35:1~36:43)

 

1. 명령이 아닌 권고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주시는 분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강제적인 것이나 인간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야곱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라반의 집에서 고생할 때(31:1), 세겜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에 불안해할 때 하나님은 도움의 손길과 보호의 은혜를 베푸시며 떠나라고 권고하십니다(35:1).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하여 인간의 삶을 포기하고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두려움에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야곱에게 먼저 임하셔서 야곱에게 갈 길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위로와 평안을 베풀어 주십니다.

 

2. 복종이 아닌 순종

라반의 집에서 친족과 무관하게, 세겜 지역에서 자신의 행동과 무관하게 악의 관영함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한 야곱은 하나님의 권고에 기꺼이 순종합니다. 스스로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라’고 권면하고,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며 행동합니다(35:2, 3). 야곱의 행동에 하나님이 상벌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인간이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일하심으로 인간을 변화시키시는 분입니다. 야곱의 생애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요구하신 것이 없습니다. 오직 먼저 나타나 말씀하시고 약속하시고 신실하게 야곱을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배운 야곱은 하나님이 우상을 제거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이 자신에게 무익했음을 분별하였기에 스스로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3. 하나님의 도우심

세겜에서 야곱의 삶은 모든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고 가족을 이끌고 이동하는 과정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야곱에게 이주를 권고하신 하나님은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셔서’ 야곱을 추격하는 자가 없게 하셨습니다(35:5).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인간 스스로의 노력이 34장이고, 인간을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35장입니다. 다시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고,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꿔주시고,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시며 조상들과 행한 약속을 반복하여 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생애, 이삭의 생애, 야곱의 생애에 하나님이 부과한 과업이 없고, 하나님의 독단이나 명령, 강압, 통제가 없습니다. 복종과 불복종을 조건으로 하는 상벌의 경고도 없습니다. 당연히 족장들이 하나님을 위해 행한 희생이 없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하나님으로 인한 삶의 불편이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4. 만인의 하나님

창세기에는 야곱의 쌍둥이 형인 에서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서(에돔)는 스스로 장가들어 잘 살고 거뜬하게 족속을 이루었습니다. 외형적 모습은 재산상으로나 자녀들과 종족의 숫자로나 에서가 훨씬 풍성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없어도, 하나님의 도움이 없어도 롯과 에서의 경우처럼 사람들은 거뜬히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수고로 열매를 만들어 내는 일반은총을 허락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의 경우에도 하나님은 이삭만을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마엘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신다고 축복하셨습니다(21:18).

성경은 인간의 문제를 죄라고 선언합니다. 인간은 수고와 노력으로 대부분의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이 되어버린 인간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지 못하고, 죄의 원리와 방법으로 행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죄의 결과를 당하고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선택하시고 모든 인간에게 문제의 근원인 죄와 문제의 해결인 하나님을 알게 하는 계시를 진행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야곱에게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하나님을 알리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알리시기 위하여 외형적으로 민족을 이루고, 땅을 차지하는 사건을 활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바로, 아브라함과 롯, 야곱과 에서가 대조되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을 아는 것’, ‘죄를 이기는 것’,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Ⅲ. 쌩뚱맞은 꿈 이야기 (창 37:1~36)

 

1. 꿈은 꾸어지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들의 삶의 이야기와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인간들의 삶의 이야기를 교차 반복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차이점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인간들의 삶은 죄의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이며, 그 삶의 결국은 모두가 불행하고 죽는 것입니다. 야곱은 사랑의 표현으로 요셉을 애지중지했는데, 야곱의 행동이 결국 요셉으로 하여금 형들에게 미움을 받게 하였습니다. 죄의 원리로는 한 사람의 선한 의도가 다른 사람에게는 악한 결과, 불편한 상황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요셉은 두 번에 걸쳐 꿈을 꿉니다(37:5, 9). 꿈은 스스로 꾸는 것이 아니라 꾸어지는 것입니다. 일반적 꿈을 넘어 계시를 담은 꿈이라면 더욱이 하나님이 꿈을 통해 계시를 주시는 것으로 요셉은 꿈을 받을 뿐입니다. 계시를 받는 사람은 계시를 주시는 분이 계시의 내용을 알려주기 전에는 계시의 내용을 알 수 없으며, 계시의 성취가 언제 될 것이며, 어떻게 될 것인지를 모릅니다. 요셉은 스스로 형들보다 나아지겠다는 꿈을 꾸지 않았으며, 꿈이 이루어 질 때까지 참고 견디며 인내한 것이 아닙니다. 꿈의 의미도, 장차 꿈이 어떻게 실현될지도 전혀 몰랐습니다. 당연히 야곱이나 형제들도 요셉의 꿈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각자 자신들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반응하여 요셉을 미워하였던 것입니다.

 

2. 꼬이는 인생

요셉은 꿈을 빌미로 부모나 형제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이 꾼 꿈을 말했을 뿐인데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구덩이에 던져져서 죽을 위험에 빠졌고, 다행히 르우벤과 유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으나 미디안 사람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끌려갔고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렸습니다. 하나님이 후일에 요셉을 총리로 만들기 위하여 요셉의 삶을 꼬이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요셉의 꿈을 시기한 형들의 악한 마음, 죄의 마음으로 요셉에게 불행한 일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인간을 시련과 역경, 고난으로 인도하는 분이 아닙니다.

 

 

Ⅳ. 누가 옳은가? (창 38:1~30)

 

1. 성경의 반전

37장에 의하면 야곱의 자녀들 중에 르우벤이나 유다가 나름 바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그런데 38장에서는 유다의 결혼과 자녀들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전혀 바른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성경은 어떤 인물을 특별히 죄인으로 매도하거나 어떤 인물을 영웅으로 추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독히 평범한 죄인의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준이 없기 때문에 조금만 선한 행동을 하면 아예 의인으로 추앙하고 조금만 악한 행동을 하면 아예 죄인으로 매장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모든 죄인은 동일한 것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2. 누가 옳은가?

유다의 장자 엘은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여’ 죽임을 당하고, 차자 오난은 계대 결혼을 통하여 형수에게 씨가 있게 하라는 유다의 명을 반복적으로 거역하여 엘과 같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죽임을 당합니다. 유다는 부인이 죽은 후 창기의 집에 들어가려했으나 다말이 유다를 속이고 잉태하여 베레스와 세라를 출산합니다. 옳아 보이는 유다가 틀리고, 부정한 것 같은 다말이 ‘그는 나보다 옳도다’는 평을 듣습니다. 그러나 결국 유다의 가족 중에 누구하나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이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행동과 하나님의 역사를 자꾸 대조시켜줍니다. 디나의 추행사건, 시므온과 레위의 살육, 르우벤의 서모 빌하와의 통간, 유다 자녀들의 악행, 유다의 실수와 다말의 간교함 등은 모두 인간들이 죄에 잡힌 가치관과 죄의 원리에 따른 행동입니다. 사람 중에 특별히 구분된 사람, 더 나은 사람은 없습니다. 세겜 족속의 일이나 유다의 일이나 동일한 죄인의 모습입니다. 각 사람의 행동은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지켜내기 위한 적절한 조치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의 각각의 행동은 자신에게는 유익이 되지만 동시에 상대에게는 해가 될 뿐으로 결국 어디에도 인간이 더불어 함께 행복을 누리는 삶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죄인 중에 한 사람을 부르셔서 바른 가치관과 바른 원리 즉 하나님을 알리시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배타적 행위가 아니라 인류를 위한 샘플이고, 하나님의 은혜는 배타적 혜택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이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자유와 평화와 안식은 단독으로 누려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관계 속에, 삶속에 구현되기에 모든 인간과 연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인간이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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