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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와 각종 성경공부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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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강 레위기 16 ~ 22

. 속죄(16, 17)

 

1. 나납과 아비후의 죽음 (10:1~7)

여호와의 말씀(토라)는 법이나 계명이 아니기에 불순종하여 죽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여 사는 것’(18:5)입니다. 토라를 어겨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죄의 원리를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이미 죄이며, 죄를 행하였을 때 하나님께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 결과를 받는 것이며, 제사는 형벌을 주신 여호와께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 받은 결과를 벗어나기 위하여(사죄) 여호와께 도움을 구하러 나오는 은혜입니다. 토라의 규례대로 제사를 드리지 않은 것이 불순종이라 형벌로 죽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죄를 지은 죄인이 여호와가 알려준 살 길을 따르지 않기에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토라는 인간을 죄인 만드는 도구가 아니라 죄인에게 살길을 주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죄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창조하지 않으셨고, 인간이 죄를 짓도록 유도하거나 방치하지 않았고, 함정을 파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적 인격체로 창조하셨고, 다만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죄에 사로잡혔고,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인은 죄를 짓고 죄의 결과를 당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죄의 결과를 피할 길도, 줄일 길도 없습니다. (사단)는 인간과 인격적 교제를 나누지 않으며, 죄가 사죄의 방법을 제시하지도 않고, 죄인이 죄에게 사죄를 청원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죄의 잔악성이요, 인간이 죄를 두려워해야하는 이유입니다.

 

2. 죽지 않도록 하라

사죄는 인간이 용서를 비는 것(謝罪)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을 죄로 결과로부터 풀어 주는 것(赦罪)입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통해 인간이 당해야 하는 죄의 결과를 피하게 해주고, 더 나아가 대신 당해주시는 대속(代贖)을 통해 인간을 속죄(贖罪), 구속(救贖)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 , 토라는 속죄이지 절대로 정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 보호하시는 분이기에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에게 죽는 경우란 없습니다. 죄인들은 나름대로 죄의 결과를 피하기 위한 다양한 수단을 동원합니다. 자신들의 기준에 근거한 종교적, 우상적, 보상적 방법을 만들어냅니다. 물론 모두 헛되고 무용한 것이지만 죄인의 대책없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어리석은 수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나 속죄일의 규정을 주신 것은 그것 자체가 옳은 수단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사죄의 길을 알려주심으로 하나님이 진리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임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평화와 안식을 얻고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3. 속죄일

속죄일에 대하여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칠월 즉 그 달 십 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16:29)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괴롭게 함은 고행이나 기행이나 속죄를 위한 죄 값을 치루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속죄일에는 정작 아무 일도 하지 않기에 도리어 편안한 날입니다. 죄를 벗기 위한 죄적 수고의 행위를 멈추고 다만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그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을 하나님이 거룩케 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제사가 은혜의 수단이기에 제물은 거래의 조건이나 상응하는 값이 아니라 단지 죄의 중함을 인식하게하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죄인은 이미 죽어야 했음을 알고, 현재 살고 있는 것조차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은 더더욱 하나님의 은혜이니 이제 그 본분과 위치를 알아 하나님의 말씀, 가르침을 순종하여 행복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사유(赦宥, 죄를 용서해 줌), 성도의 사유

죄를 사하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죄를 이길 수 있는 분, 죄의 결과가 임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분, 죄로부터 인간을 보호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죄를 사하는 권세를 위임하거나, 인간 중재자를 세운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죄로부터 구원함을 받은 자, 죄의 결과로부터 보호함을 받은 자가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는 죄를 사해줄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이 말은 성도가 죄의 결과를 이길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상대가 나에게 죄를 범했을 때 나도 동일한 죄의 원리로 행할 수 있지만 성도가 죄의 원리를 따르는 대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대할 때 상대는 나에게서 받을 죄의 결과를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에 성도는 마치 자신이 죄인을 용서한 듯, 자신이 죄인을 배려한 듯 교만한 자세가 아니라 성도가 죄의 원리를 따르지 않음으로 성도 자신이 죄의 결과를 면하고 하나님의 마음의 풍성함을 누리게 된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 가증한 풍속 (18 )

 

1. 존재적 변화, 인식적 변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실 때 반드시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진멸법(헤렘)의 의미는 상대를 멸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승리의 대가를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수고와 노력의 결과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방식입니다. 상대방을 행한 하나님의 진멸은 몰살이 아니라 몰아내는 것이며, 모두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섞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 이유가 레 18:3~5절입니다. 애굽과 가나안이라는 특정한 국가나 민족의 문화를 차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부터 시내산까지 진행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속성을 알았고 하나님의 마음, 기준, 가치, 원리, 방법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계시 이외의 모든 민족과 국가가 가지고 있는 원리는 죄의 원리입니다. 이스라엘이 죄의 원리로 사는 애굽에서 나와서, 죄의 원리로 사는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장소의 변화만 있을 뿐 정작 삶에서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애굽에서 나옴으로 애굽인들과 구별된 것처럼 가나안에서 가나안 백성들을 몰아냄으로 가나안인들과 구별될 것 즉 애굽이나 가나안이 가지고 있는 죄의 원리, 죄의 가치를 떠나 그 동안 배운 하나님의 원리대로 살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체도 유리하는 아모리 족속이었기에 이스라엘이나 애굽이나 가나안에 대한 민족적 차별성은 없습니다.

 

2. 애굽, 가나안의 풍속과 규례

하나님이 인도할 땅, 이스라엘이 몰아내야 할 대상은 가나안의 일곱 족속입니다. 그 계보는 노아와 함의 자손이고(10:15~18), 이들이 사는 가나안 땅에 대한 예언은 창15:18-21에 나옵니다. 가나안은 함의 부적절한 행동의 결과로 태어난 자손이고(9:22, 25), 가나안의 지경은 소돔과 고모라를 포함하고 있으며(10:19),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온갖 불의와 패역함이 자행되었습니다(191~11). 18:3~5에서 애굽 땅의 풍속과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를 행하지 말라는 말씀과 이어지는 18:6~23절에 나열된 성적인 문란함은 창세기에서 가나안의 후손이 살고 있는 가나안 지방에서 행해진 일과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 사건이후 벌어진 함과 가나안과 관련된 사건을 죄인이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 하나님의 성품이 반영된 존재,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왜곡한 대표적 사례로 삼고 멀리하라고 권고하십니다.

 

3. 스스로 토하여 내느니라

죄의 결과는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아니라 죄의 결과요, 죄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이 형벌을 내리지 않아도 죄인들은 스스로 죄의 결과를 맞이하여, 스스로 멸망합니다. 인간의 결과는 죄로 자초한 자멸입니다. 가나안이 가나안 지역에서 쫓겨나는 것은 이스라엘을 거주하기 위한 배타적 인종정책에 따른 추방이 아니라 죄의 결과입니다(15:16, 9:4~5). 동일한 원리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죄의 원리를 따라 행하면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을 인하여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18:25)가 될 것입니다.

 

 

. 거룩한 풍속 (19, 20, 21, 22 )

 

1. 거룩한 풍속

죄인들이 행하는 가증한 풍속과 대조되는 것이 이스라엘이 행하는 거룩한 풍속 즉 토라를 따라 사는 삶입니다. 거룩한 풍속은 새로이 신성하고 거룩한 행위를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원리로 사는 것으로 예를 들어 자녀를 몰렉에게 주는 것,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것,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것등이 하나님이 원래 인간에게 의도했던 행위가 아니기에 가증한 풍속이고 이스라엘에 행하라고 기대하는 토라의 삶은 가증한 풍속을 폐하여 버리는 것이다. 토라의 모든 조항들은 죄의 원리대로 행치 말 것, 인간을 불행하게 하지 말 것, 스스로 멸망할 행동을 하지 말 것, 무익하고 헛된 일을 하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토라는 인간의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가르치심입니다. 제사법도 인간의 죄 사함을 위하여, 도덕법도 인간의 바른 삶을 위하여, 사회법도 인간관계의 정당한 질서를 위하여 모두 인간의 행복을 위한 원리입니다. 토라는 따라 사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이전에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지름길이기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토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주관자이심을 전제하고 하나님이 인간을 돌보심을 약속하고 가르치신 내용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죄인은 토라를 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삶의 규범이나 정언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 토라를 주시기 위해 즉 인간의 순종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이해시키기 위해 참으로 다양한 인간의 삶의 현장에서 계시를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토라가 세상의 지혜, 교훈, 격언, 덕담과 다른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명, 법으로 오해되는 근거가 반드시 죽일지니라와 같은 표현입니다(20). 접신한 자와 박수무당을 음란하게 따른 자가 있을 경우 죽이지 않고 권면하여 돌이키게 하면 불법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고 치유하고 품어주고 싶어도 반드시 죽이라는 말씀 때문에 무조건 죽여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토라를 주신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순종할 수 있습니다.

 

2. 거룩한 제사장, 성물

제사장에 대한 규례와 성물에 대한 규례는 흠이 없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자격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고, 제사장이나 성물 자체를 거룩하게 하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의 온전함을 가르쳐 주어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존재가 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조건을 제시하여 아무런 흠이 없는 자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죄인이 하나님께 속하여 흠 없다고 인정함 받으며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는 예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명령, 요구가 아니라 친히 인간을 만들어내실 하나님의 선언, 의지의 표현입니다. 예물에 관해서도 흠없는 예물, 좋은 예물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그 예물을 인간이 먹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

레위기 전체에서 가장 강조되는 구절은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입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나는 거룩한 여호와니라고만 선언하신다면 인간에게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복음인 것은 거룩하지 않았던 우리를 여호와께서 거룩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결과 죄인이었던 우리가 거룩해 질 수 있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강조하는 이유는 인간을 설득하기 위해서이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하나님을 앎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를 인간이 삶에서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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