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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와 각종 성경공부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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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강 창세기 18 ~ 22 장

 

Ⅰ.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창 18:1~19)

 

1.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은 숨어 계신 분, 은밀히 일하시는 분, 미스테리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드러내고 나타내고 가르치고 보여주며 계시하는 분입니다. ‘숨어계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비밀’ 등의 표현은 하나님이 일부러 숨고 감춘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인이 하나님을 모르기에 숨어계신 것처럼, 마치 비밀처럼 여겨진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죄인)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의 원리를 알아야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며 친히 인간을 가르치십니다. 시험과 훈련, 연단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바꾸어주신 하나님은 반드시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을 것을 다시 말씀하시지만(17:19, 18:10) 두 사람은 자신들의 능력만 생각하기에 불가능한 이야기로 생각하여 웃습니다. 아브라함의 의견(17:17)과 사라의 의견(18:12)은 옳습니다. 다만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17:1, 18:14)를 몰랐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단지 한 가정에 아들이나 상속자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자녀를 출산할 수 없는 가정에서, 더 이상 인간적인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자녀를 낳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2. 내가 하려는 것을 숨기겠느냐?

기독교의 용어는 하나님과의 관계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분리되어 먼 곳에 계시는 제삼자, 단지 심판자가 아니십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인간의 주관자, 책임자, 보호자이십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태초부터 온전히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 독단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예고-실행’, ‘약속-성취’, ‘예언-완성’의 방식으로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인간이 알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기에 계속하여 알리십니다(18:17).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의 행복입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18:18)는 말씀은 다른 인간과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모습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대상은 언제나 ‘땅의 모든 족속’(창12:3), ‘천하만민’(창18:18)입니다. 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18:19)는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의 원리를 행하는 것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신10:12, 미6:8). 아브람은 모든 인류의 샘플로, 아브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곧 인류를 향한 뜻입니다. 신앙적 실천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행하여 해야 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시듯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른 인간을 대할 때에 모든 인간이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Ⅱ. 이 땅에 의인이 있는가? (창 18:20~20:18)

 

1. 소돔과 고모라의 실상

18, 19장에 소개된 소돔과 고모라는 특별히 악한 것이 아니라 죄인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한 것(6:6 8:21)은 홍수 전과 후에 동일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죄인 된 삶의 단편으로,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며 남녀 간의 질서가 무시되며 하나님의 음성이 무시되는 모습으로 죄인의 자멸을 증거 해 줍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맺으신 보존의 약속을 지키시지 않으면 모든 인류는 동일한 멸절을 당하게 됩니다. 성경은 특정 인물, 상황, 시대, 지역을 ‘더 나은 것’이나 ‘더 못한 것’으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속성이 같기에 인간의 삶의 양상 또한 다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현상(19:1~11)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기대하는 현상(18:18~20)이 대조가 됩니다.

 

2. 아브라함의 오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이지만 아직도 죄인의 실체와 하나님의 기준과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이 자기의 기준으로 하나님께 탄원한 것이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의인이 오십 명 정도 또는 최소한 열 명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 아브라함의 오해였습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아내를 기꺼이 바로에게 내어준 아브라함 자신도 전혀 의인이 아니요 전형적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파멸 중에 롯과 가족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롯과 가족이 의로웠기 때문이 아니요, 아브라함의 중보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심정을 헤아려(19:29)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19:16).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억울한 것이 아니라 롯의 가족이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3. 죄인의 행동

롯의 가족을 향한 하나님의 권고는(19:17) 계명이나 법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살 수 있는 방법을 주는 것입니다. 유황과 불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뒤를 돌아보거나 머무르거나 하면 당연히 죽습니다.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된 것은(19:26)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사는 방법을 거부한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죽음의 저주를 하지 않습니다. 죄인은 이미 사망의 길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죽음으로 가는 죄인들이 살아날 수 있는 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심판받고, 징계 받고, 벌을 받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은혜와 복만 주십니다.

롯과 자녀들의 행위는(19:30~38) 소돔사람들이 천사들에게 했던 행위와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신 바른 인간관계를 넘어서는 악이 노아의 아들 함에게서, 다시 롯의 자녀들에게서 발생하고 그 결과는 인간의 행복이 아니라 또 다른 인종간, 민족간의 다툼과 갈등의 요소에 불과합니다.

 

4. 하나님의 은혜

소돔과 고모라 사건과 관련하여 성경 어디에도 아브라함이나 롯의 의로움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바로 뒤이어 아브라함이 거처를 옮겨 그랄 지방에 우거하며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여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20:1~2). 단순히 이전에 애굽에 내려갈 때의 행위가 반복되는 정도가 아닙니다. 13장부터 19장까지 하나님은 약속을 반복적으로 확증해 주셨고, 언약을 맺어주시고, 이름을 고쳐주고, 할례의 증표도 만들어 주셨고, 특히 반드시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을 것을 두 번이나 말씀해 주셨는데 아브라함은 아직 하나님의 전능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행동과 대조하여 아비멜렉이 ‘의로운 백성’으로 소개되고, 이번에도 사라를 구하는 일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죄인 중 누구에게도 선하고 의로운 행위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을 도와주십니다.

 

 

Ⅲ.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창 21:1~34)

 

1.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만나 처음 말씀하신지 25년이 지나, 언약을 맺은 지 15년이 지나, 할례를 행한 지 1년이 지나, 아브람과 사라가 하나님을 비웃은지 1년이 지나, ‘내년 이맘 때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한지 1년이 지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아들을 얻었습니다(21:21~22). 그 동안의 여러 사건들은 우연으로 치부할 수도 있었지만 직접 자신들의 불가능성을 뒤집은 출산을 통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게 된 두 사람은 ‘비웃음’이 ‘웃음’으로 바뀌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17:19)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정하고 할례도 행합니다. 아브라함이 스스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첫 번째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가 드디어 아브라함의 마음과 행동의 변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2.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라

사라는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21:6)고 했지만 실상은 이삭이 성장하며 이스마엘과 갈등이 생기고 사라와 하갈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아브라함의 고민함에 대해 하나님의 대답이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라’입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보호하실 것처럼 이스마엘도 보호하시고, 사라를 권고하시듯 하갈도 권고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갈에게 말씀하신 것을(16:10) 기억하시고,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이 약속을 확증해 주십니다(21:18). 하나님은 특정한 사람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며, 특정인을 통해 일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일하심임을 보여주어 백성들로 알게 하기 위한 샘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신앙은 인간이 하나님께 충성한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신 결과입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삶을 보고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21:22)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로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갈은 자신의 처지를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렀고(16:13), 아브라함은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21:33). 순종, 찬양, 경배 등 신앙의 모습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감사의 반응입니다.

 

 

Ⅳ. 여호와 이레 (창 22:1~24)

 

1. 우리가 돌아오리라

죄인인 아브람을 부르시고 하나님을 가르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거듭되는 아브라함의 불신에도 지속적인 은혜로 아브람을 만들어 내었기에 아브라함의 수준과 상태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가장 잘 아시기에 아브라함을 시험할 이유는 없습니다. 인간을 축복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제물로 요청하시지도 않습니다. 아들을 얻기까지만이 아니라 민족을 이루는 약속까지 지키실 것을 확증해 주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함을 경험한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 이삭이 죽지 않을 것을 알기에 산에 올라가며 종들에게 ‘우리가 돌아오리라’(22:5)고, 제물에 대해 묻는 이삭에게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22:8)고 말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모두 알고 있습니다. 믿음 없는 아브람에서(12장) 믿음 있는 아브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22장). 신앙은 하나님을 모른 채 도전하는 모험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감사하면서, 자연스럽게, 평안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2.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아브라함 개인의 믿음과 신앙의 결단과 헌신이 아니었기에 하나님은 개인적 축복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아브람을 선택한 후 하신 최초의 약속을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면서 확인해 주십니다(22:16~18). 개인을 넘어, 민족을 넘어,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입니다.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12:3), ‘천하 만민은 복을 받게 될 것이라’(18:18)가 반복됩니다. 이 사건의 핵심은 아브라함의 헌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아들 하나를 얻었을 때에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도 밀가를 통해 여덟 명의 자녀를 얻어서 아브라함보다 더 큰 가정을 이룹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아브라함의 특성은 ‘의로운 행위’, ‘헌신적 믿음’, ‘아들을 얻음’이 아니라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고’(18:19)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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