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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와 각종 성경공부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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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강 창세기 23 ~ 27 장

 

Ⅰ. 아브라함의 소유지 (창 23:1~20)

 

1. 약속의 성취

사라가 죽자 아브람은 매장지를 구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헷 족속 주민들과 땅 주인 에브론이 무상으로 제공하려(23:6, 11, 15) 하지만 아브람은 기어코 값을 주고 땅을 사서 소유지로 확정합니다(23:4, 8, 13, 18, 20). 아브람은 하나님께 아들의 약속을 받은 대로 아들을 얻었으나, 땅의 약속에 대해서는 아직 성취가 없었습니다. 이삭의 번제 사건을(22장) 통해 아들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 받은 아브람은 가나안 땅을 소유지로 확정함으로 땅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도 확증을 받습니다. 약속의 땅임에도 불구하고 기근이 들자 너무나 당연하게 약속의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내려갔으며, 그 후에도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유랑하던 아브라함이 스스로 가나안 땅을 소유함으로 약속의 땅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에 대한 태도가 변한 것처럼 땅에 대한 인식이 변화된 것입니다.

 

2. 약속의 땅 or 약속의 하나님

사라를 위해 얻은 땅은 아브라함이 거주하며 농사를 지으며 자신의 삶의 안정을 위한 수단으로 삼을 수 있는 농지가 아니라 에브론이 기꺼이 무상으로 내어줄 수 있는 무용한 땅 즉 무덤일 뿐입니다. 애굽에서의 사건(창 12), 롯이 선택한 소돔의 사건(창 19장)을 통해 땅의 지리적, 지질적 상태가 아니라 가나안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에 가능한 결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의대로 아무에게나, 아무 땅을, 아무렇게나 부여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의 땅을 무력으로 빼앗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대가를 주고 샀습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죄의 원리를 사용하지 않고 공의를 행한 것입니다. 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입성할 때도(여호수아서) 신의 권세를 힘입어 무력으로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의 죄의 결과로 자멸하는 땅을 취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하나님으로서 특정인을 위한 은혜가 특정인의 손해가 되게 하는 죄의 원리가 없습니다.

 

 

Ⅱ. 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삼고 (창 24:1~25:26)

 

1. 기껏 고른 신부가 석녀(石女)?

아브라함에 관한 마지막 기록인 이삭의 아내를 구하는 장면은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24:1)로 시작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보여줍니다(24:3, 7). 자세히 소개되는 종의 여행, 리브가를 만남, 간구(24:13), 고백(24:27, 48, 56), 설명, 리브가의 결단 등의 과정은 이 일이 하나님의 준비이며 응답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준비한 신부임에도 불구하고 리브가는 아브라함에게 민족을 형성케 해주겠다는 약속의 성취를 결코 이룰 수 없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입니다(25:21). 하나님께서 선택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 이어 며느리 리브가까지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인 것은 하나님의 실수나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민족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결단코 우연이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강조하여 아브라함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전능성과 신실성을 가르치고자 함입니다.

 

2. 어느 세월에?

아브라함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과 후처 그두라를 통해 여섯 아들을 낳았습니다(25:1). 하지만 초점은 약속의 아들 이삭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에 태어나 40세에 결혼하고 60세에 하나님의 은혜로 에서와 야곱을 낳습니다. 반면 이스마엘은 너무나 순적히 열두 아들을 낳습니다. 상대적으로 아브라함은 175세에 하늘의 별과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은 후손을 보고 죽는 것이 아니라 불과 손자 둘만을 볼 뿐입니다. 하지만 손자 둘을 보았다는 것이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으로 인정됩니다. 왜냐하면 에서와 야곱의 출생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자녀를 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삭을 출산했고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자녀를 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과 에서를 출산했으니 ‘불가능이 가능하다는 것’은 ‘두 자녀가 민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약속하시면 ‘언제요? 어떻게요?’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누가요? 왜요?’ 즉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가르칩니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이루시며, 그 과정을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아야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Ⅲ. 신앙교육은 오직 하나님만이 (창 26:1~34)

 

1. 부전자전(父傳子傳) : 죄전(罪傳)

성경은 어떤 인물도 영웅을 만들지 않습니다. 성경의 목적이 하나님을 알리는 것이기 때문에 영웅이란 존재 할 수도 없으며 필요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전혀 없습니다. 흉년이 들자 이삭이 행동하는 방식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모를 때 행하던 방식과 똑같습니다(26:1). 하나님은 단지 이삭의 애굽 행을 막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약속을 동일하게 반복해 주십니다(26:3). 이삭은 하나님이 임재하사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기에 안내려 갈뿐 죽기를 두려워하여 아내의 신분을 속이는 행태는 동일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모르기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의 약속 그리고 자신과의 약속의 의미도 알지 못하기에 취하는 행동입니다. 이때에도 하나님이 은혜로 리브가를 구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아내를 통해 민족을 세우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아내를 구해주는 정도가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인간은 스스로의 방법으로 도무지 하나님을 배울 수 없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얻을 수 없음도 강조합니다.

 

2. 역전 드라마 or 하나님의 일하심

이삭이 실수를 행한 장면 다음에 책망이나 형벌 대신에 그 땅에 농사하여 백배를 얻고 여호와께 복을 받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26:12). 하나님이 이삭에게 흉년 때에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권고나, 약속을 이루겠다는 말씀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이삭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삭의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일하셔야만 합니다. 이삭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 이삭(인간)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삭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바로 축복사건입니다. 하나님이 복주시고 도우심을 알게 되면 흉년이 들어도 다른 곳으로 이동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삭에게 축복을 받을 만한 의로움이 있었던 것이 아니기에 이삭이 축복을 받은 방법이나 현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는 이유를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 이삭의 변화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우물사건입니다. 흉년 때문에 애굽으로 가려던 이삭, 목숨 때문에 아내를 버리려던 이삭이 사막지역에서 생명의 근원되는 우물을 빼앗김에도 넉넉하고 여유롭게 대처합니다. 어떤 곳을 파도 우물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보고 대적들이 아무리 공격을 해도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에 자신과 가족이 하나님의 보호함을 받게 될 것이며,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26:22)고 고백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불가능이 가능해지는 것을 배운 이삭은 이제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리,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3. 하나님의 교육

아브라함과 이삭의 생애에 사람이 먼저 하나님께 복을 받을 만한 선하고 의로운 행위를 한 적이 없습니다. 도리어 인간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심으로 인간의 행동을 변화시켜 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주변인에게까지 영향을 주어 이삭을 삶을 지켜본 아비멜렉이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만이 죄인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며, 하나님이 만들어내는 인간의 변화는 상황적, 외형적, 조건적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삶의 기준, 가치, 개념, 원리, 방법, 인식이 변하고 이어서 행동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행동에 의한 하나님의 감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Ⅳ. 네가 누구냐? (창 25:27~34, 27:1~46)

 

1. 복중에서부터

종종 성경에는 뜬금없이 보이는 장면들이 나오지만 사실은 앞뒤가 연결된 심오한 내용들입니다. 리브가가 임신하였을 때 쌍태였고 그때 이미 ‘큰 자(에서)가 어린 자(야곱)를 섬기리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장자권은 인간들끼리나 중요할 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기에 에서의 장자권에 대한 경홀히 여김이나 리브가의 장자권에 대한 집착은 죄인들의 관심거리일 뿐입니다. 만약 이삭이 에서를 축복하려는 것에 대해 리브리가 하나님의 예언을 기억하고 야곱이 축복을 받게 하려고 시도했다면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이 이루실 것인데 인간이 억지로 하나님의 일을 만들어 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리브가 때문에 야곱은 부모형제와 이별하고 험난한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이삭의 야곱 축복사건은 아브라함과 약속하셨던 하나님을 아는 민족을 세우는 일은 인간의 기준과 방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2. 하나님을 아는 것

리브가, 에서, 야곱은 서로 속고 속였으나 이삭은 속아주었습니다. 이 사건이 발생할 때 에서는 결혼을 하였고 야곱은 미혼이며 77세였고 이삭이 137세 쯤 되었고, 리브가가 속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건강이 나빴습니다. 만약 이삭이 민족을 형성해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이루려고 했다면 미혼은 야곱보다 기혼인 에서에게 소망을 두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하나님을 배웠고 하나님의 약속을 알았던 이삭은 모략이나 지혜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었습니다. 누가 장자이든, 누가 이삭의 축복을 받든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이 직접 이루어가심을 알았기에 온 가족의 속임수에 속아 줄 수 있었습니다. 리브가의 잔꾀로 야곱이 이삭의 축복을 받지만 고향을 떠나 험난한 생활을 살게 되고, 비록 장자권을 넘겨주었을지라도 에서가 이삭의 재산을 모두 물려받고 부모를 모시며 살게 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하나님께 선택받을 만한 자격이나 조건은 원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복락을 누리게 하려는 목적으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죄인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해 죄인의 사고와 인식, 방법과 전혀 다른 하나님의 일하심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3. 사명 or 누림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말씀, 이삭에게 하신 말씀, 이스마엘에게 하신 말씀 중에 인간이 달성해야 할 목표, 성취해야 할 과업이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 하나님께서 이루셔야 할 일에 대한 선언입니다. 사람 중에 하나님 때문에 부담을 느끼고 불편을 겪은 사람이 없습니다. 도리어 하나님 때문에 위기를 극복하고 문제를 해결한 사람만 있습니다. 아브람을 모델로 삼거나, 아브람에게서 배울 것이 없습니다. 아브람을 대해주시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기대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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