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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와 각종 성경공부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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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강 창세기 46 ~ 50 장

 

Ⅰ. 나는 하나님이라 (창 46:1~34)

 

1.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은 객관적으로 절대적 능력을 가진 신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성경 내용의 협소함, 일반성, 평범성에 어이없어 할 정도입니다. 타종교의 신, 철학의 신은 능력만 있을 뿐 인격이 없고, 힘만 있을 뿐 사랑이 없고, 권세만 있을 뿐 은혜가 없고, 홀로일 뿐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창조자요, 인간의 주(主)로서 죄에 잡힌 인간을 찾아오시는 분,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친히 일하시는 분, 약속을 하시고 직접 이루어 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 아니라 철저하게 인간의 삶에 관계된 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위에 군림하기 위해 인간보다 강함을 과시하기 위한 사역이 아니라 인간의 일상에서 죄보다 하나님이 옳고 유익함을 알게 하기 위한 계시로서의 사역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추상적, 개념적, 존재적 신이 아니라 역사적, 실천적, 관계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예표성, 하나님의 사건의 계시성 등을 분별해야 합니다.

 

2. 나는 하나님이라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31:13), 세겜에서 두려워할 때(35:1) 찾아오셨던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가나안의 기근으로 삶의 위기에 처해있는 야곱을 친히 먼저 찾아오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은 약속의 땅에 머물다가 위기가 닥쳤을 때 스스로 떠났고(12:10, 26:1, 28:10) 불행하게도 피난한 곳에서 더 큰 위기에 처했습니다. 겨우 고향에 정착한 야곱이 약속의 땅을 떠날 수도 없고, 기근을 극복할 수도 없고, 애굽의 총리에게 자녀를 빼앗긴 채로 머물러 있을 수도 없고, 강대국 애굽에 스스로 내려갈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온 우주만물의 권세자로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아브라함, 하나님과 야곱의 관계를 선언하시고, 친히 동행하실 것과 장차 야곱에게 되어 질 일을 모두 알려주심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안내해 주십니다(46:2~5). 이미 수차례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한 야곱은 이제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순종합니다.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장 좋은 방법을 선택하여 스스로 따른 것입니다. 물론 ‘복종에 대한 보상’이란 없고, 순종으로 인한 삶의 평안이라는 열매가 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자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실 때 성도는 ‘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3. 이스라엘 가족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의 가족은 육십 육 명이고 애굽에서 요셉이 낳은 자식을 포함하여 모두 칠십 명이었습니다. 아브람이 부모를 떠났고 아내는 출산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시작하여 삼대 만에 커다란 부족이 되었습니다. 아브람, 이삭, 야곱은 단지 생존을 위해 애를 썼을 뿐 하나님의 명령을 달성하려고 애쓰지 않았지만 어느새 하나님은 족장들에게 반복적으로 하신 약속을 지켜오고 계셨습니다. 사라, 리브라, 라헬 등 출산이 불가능한 여인들을 통해 민족이 형성된 것은 오직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임을 알려줍니다. 족장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행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늘 족장들과 함께 하셨고, 가나안의 땅을 소유하게 하셨고, 애굽에 총리를 세워두심으로 이스라엘의 가족들이 안전하게 이주할 수 있는 준비까지 모두 마련해 두셨습니다. 성경의 사역은 인간이 하나님을 위한 헌신과 충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위한 사랑과 계시입니다.

 

 

Ⅱ.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창 47:1~49:33)

 

1. 애굽의 좋은 땅

성경에 애굽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아브람의 이주 때부터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기근이 발생해도 애굽은 언제나 풍성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겨우 부족임에도 불구하고 애굽은 언제나 강대국입니다. 이스라엘은 늘 위험에 처하는데 애굽은 피난처가 되어줍니다. 하나님이 돕지 않아도 애굽은 형성되었고, 하나님이 돕지 않아도 애굽 사람들은 강성하여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보다 애굽의 바로가 더 크고 강성하며, 약속의 자녀인 이삭보다 이스마엘이 더 순적히 자녀를 낳았으며, 에서와 야곱 중에 에서가 더 평탄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를 출산하기 좋은 여성들을 선택하지도 않았고, 나일 강을 포함한 비옥한 환경의 애굽을 선택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일하심이 단지 번성함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인간 중에 한 사람 아브람을 택함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사역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계시였습니다.

 

2. 험악한 세월

바로와 대면한 야곱은 자신의 삶에 대해 ‘나그네 길의 세월’, ‘조상의 나그네 길’, ‘험악한 세월’이라고 합니다(47:9). 조상들의 삶은 하나님으로 인해 힘들고 어려웠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시험과 훈련, 연단의 명분으로 족장들을 위험한 상황으로 몰고 가신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족장들은 하나님 때문에 불편해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는 언행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족장들이 처한 험악한 세월 중에도 하나님이 동행하셔서 생명을 보존시키셨고, 가문을 이루게 하셨고, 삶을 정착할 수 있게 도와주셨기에 족장들은 단을 쌓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족장들을 훈련시켜 별도의 과업을 맡기지 않았고, 족장들이 행한 일에 대해 상이나 벌을 내리지도 않았습니다. 족장들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 은혜 받은 결과입니다. 애굽조차도 기근에 허덕일 때 하나님이 예비하신 요셉을 통해 모든 사람이 생명을 보존하고 특히 이스라엘 족속은 생육하고 번성하기까지 합니다(47:27). 야곱은 바로 왕에게는 험악한 세월이라 고백하지만 요셉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예전에 잃었던 요셉과 재회하고 요셉의 자녀까지 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기를 소망하는 모습이 자신을 애굽이 아닌 조상의 묘지에 장사할 것을 요청하는 모습에 담겨있습니다(47:30). 성경에는 족장들이 행한 업적이나 족장들의 삶에 대한 칭송이 없고, 족장들에 대한 특별한 상이 없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선택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이 최고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3. 야곱의 축복

죄인이 받은 가장 큰 은혜는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자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은 주변인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며, 그들의 삶을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자신의 인생역정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과 일하심을 알려주고(48:3~7), 요셉의 자녀들을 축복할 때에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기대를 말합니다.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 자신과 동행했던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며, 자녀들의 삶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손이 장자와 차자의 머리에 엇갈려있음을 알고 바로 잡으려 하나 야곱은 여상하게 대합니다. 이미 야곱은 쌍둥이 형 에서와의 관계에서 장자의 축복권으로 인한 쓸모없는 갈등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형과는 원수가 되었고, 모친과는 생이별하여 다시는 재회하지 못했고, 자신의 삶도 험악한 나그네 생활이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장자권과 관계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강조점은 오직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로 ‘하나님’이었습니다.

 

4.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

야곱은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말합니다(49:1). 성경에는 인간의 장래를 점치는 주술이 등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와 무관한 개인의 삶에 대한 예언이란 없고, 예언을 통해 개인의 영달을 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없습니다. 야곱은 예언적 통찰력을 가지고 자녀들의 앞날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은 개인의 삶을 운명적으로 결정해 놓지 않으십니다. 야곱이 임종 전에 열두 아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축복하는 것은 모세가 임종 전에 열두 지파의 이름을 불러가며 축복하는 것에서 재현됩니다(신 33:1~29). 야곱이나 모세가 개인의 능력으로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과 모세를 통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선포하셨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장차 이스라엘에게 행하실 일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Ⅲ. 하나님이 돌보시리니 (창 50:1~26)

 

1.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

요셉의 형제들은 우여곡절 끝에 요셉의 도움으로 애굽에 정착하였고 이미 여러 해를 살았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과거를 책망하지 않았고 도리어 지성으로 도와주었습니다. 야곱의 죽음은 ‘가나안의 애통, 애굽의 애통’이었으나(50:11) 요셉의 형제들에게는 두려움이었습니다(50:15). 형제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운운하며 용서를 빌었고 심지어는 자신들이 요셉의 종이라고 선언하기까지 합니다. 그 동안의 요셉의 행동을 하나님을 배운 사람의 변화된 원리로 이해하지 않고 단지 권세자의 관용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형제들은 요셉을 만난 후 계속하여 언젠가는 요셉이 보복할 것을 염려했을 것입니다. 죄인은 죄의 원리만 알고,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죄의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왜곡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요 신앙의 성숙은 자신의 일을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비록 형제들이 자신을 팔고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자신의 삶을 도우셨음을 알았습니다(50:20). 자신의 총리됨이 권세가 아니라 가족을 보전하려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기에 형제들에 대하여 보복이 아니라 형제들과 그 자녀들까지 기르겠다고 위로하며 다짐합니다. 요셉과 형제들의 차이점은 신분의 차이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정도의 차이입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라는 권세를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총리라면 권세로 치를 하였을 것이지만 하나님을 알았기에 요셉은 사랑으로 형제들을 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이 돌보시리니

외지인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이 총리의 직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만약 요셉의 덕분이라고 생각했다면 이스라엘은 또 다른 요셉과 같은 인물을 만들려고 온갖 정치력을 동원해야 하고, 요셉도 자기를 대신할 사람을 중직에 앉혀 놓아야 안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죽음을 맞이하면서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시며, 반드시 돌보실 것을 선언하는 것으로 유언을 대신합니다(50:24, 25).

 

3. 하나님을 알라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족장들의 역사가 요셉까지 이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당대 최고의 갑부가 된 것이 아니며, 이삭은 당대 최고의 경영인이 된 것이 아니며, 야곱은 당대 최고의 명문가를 이룬 것이 아니며, 요셉은 당대 최고의 권세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사역은 인간 상호간에 비교적 우위를 형성하신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을 택하여 계시적 사역을 행하심으로 인간의 문제의 본질이 죄임을 지적하시고, 죄를 이기고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이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족장들은 타인들보다 높은 자가 된 것이 아니라 ‘다른 자’(거룩한 자) 즉 ‘하나님을 아는 자’(성도)가 되었고, 하나님을 아는 자로 말미암아 주변인들도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인물들은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배워가지만 신약의 성도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고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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