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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와 각종 성경공부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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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민수기 1 ~ 8

. 하늘의 별과 같이 (1)

 

 

1. 인구조사 및 이동, 야영도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시내산에 도착하여 한편으로는 생명의 속전을 위하여(30:12), 다른 한편으로는 이동을 위한 진영을 정리하기 위하여(1:3) 애굽 땅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부터 인구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십 세 이상 싸움에 나갈 만 한 자가 603, 550(1:46), 레위인이 22,000(3:39), 삼십 세부터 오십 세까지 회막 봉사와 메는 일에 참여하여 일할 만 한 자가 8,500(4:48)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로만 인식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다른 민족이나 국가와 비교, 경쟁하는 구도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숫자는 하나님에게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인류를 대하시는 하나님에게 이스라엘은 샘플이라는 것 이외의 구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고 열방이 복을 받도록 하시겠다고 선언하셨고, 민족은 숫자가 명시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입니다.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며 결국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하시겠다는 의미였습니다.

 

 

2. 이십 세 이상의 계수

이스라엘은 어느 민족의 수고의 결과, 특정 공동체의 헌신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인구조사는 오직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만 합니다. 하나님의 인구조사는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을 철저하게 계수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애굽에서 나온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수많은 잡족도 있었습니다(12:38).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할 때 수많은 잡족은 계수되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인구조사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조차도 남자만 그것도 이십 세 이상의 남자만 계수하고, 이스라엘의 총수에 레위인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왜 이십 세 이상이냐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인구조사는 정확한 숫자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이스라엘 즉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모든 인류가 될 것입니다.

 

 

 

. 동서남북 (2)

 

 

1. 이동을 위한 진영

인구조사의 대상은 문자적으로는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이지만 실제로는 전쟁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군대, 싸움에 나갈 만 한 자, 진영 등의 용어는 실제 전투적 용어가 아니라 오늘날의 경제인구와 같이 당시 인간의 평가기준이었을 뿐입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이 애굽과 싸워 승리하여 얻은 결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고, 앞으로 광야의 여정과 가나안의 입성도 이스라엘이 직접 전쟁을 치러 얻어내야 하는 과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단 한 번의 군사훈련도, 전략도 수립하지 않으며, 군대를 편성하여 수비대, 전투부대와 보급부대를 편성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쟁을 하고(17:8), 가나안과 전쟁을 하기도 합니다(6, 7). 하지만 전쟁은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일 뿐 이스라엘에 의해 전쟁의 결과가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략 200만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이스라엘이 시내산을 출발하여 광야를 지내기 위하여 하나님은 단지 이동을 위한 질서를 세우주신 것입니다.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으로 이동을 위하여 성막을 중심으로 백성을 질서 있게 편성하고 하나님의 동행의 모습을 강조하여 모든 민족이 성막을 중심으로 늘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이동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십 세 이상의 남자뿐만이 아니라 모든 족속이 노인으로부터 여인과 아이까지 함께 이동합니다.

 

 

2. 성막 중심

이스라엘의 배치는 성막을 중심으로 동, , , 북에 균등하게 위치하고 있습니다. 전면에 위치했다고 주력부대인 것이 아니고 후면에 위치했다고 소외받는 것이 아닙니다. 유다 지파가 앞장 서는 이유나 베냐민 지파가 뒤에 따르는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숫자가 많은 지파는 강성하고, 숫자가 적은 지파는 열세인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전후좌우 사방 모든 백성이 성막을 보고, 성막과 함께 진행한다는 것입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한다는 의미는 백성들이 성막의 울타리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반대로 성막은 어느 백성에게나 동일한 위치에 있어서 누구나 쉽게 성막을 보며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성막을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성막이 백성들의 힘이 되어준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성막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막이 백성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3. 제 이년 이월 일일에

이스라엘의 인구 조사와 진영 배치는 성막이 세워진 후에 행해집니다. 이제부터 광야의 삶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을 형성하고, 출애굽을 하고, 율법을 주시고, 성막을 세우기까지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앞서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 중에 남은 것은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분명히 행하실 일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창세기와 구별된 별도의 사건이 아니며, 가나안 입성과 구별된 별개의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20:1)는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경험된 일을 강조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사건은 아브라함과의 약속에 의해 시작된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모세가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었던 근거도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맹세하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였습니다(32:13). 정작 중요한 것은 백성의 삶입니다. 외형적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고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원리대로 살면서 광야를 지나갈 것입니다. 백성들의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나름대로 진영을 구축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저들의 필요를 아시고 백성들의 생각에 안심이 되도록 진영과 이동방식을 안내해 주시는 것입니다.

 

 

 

. 이스라엘과 레위인 (3~4)

 

 

1. 레위인은 나 자신

출애굽은 유월절로 기억되고,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합니다. 열 번째 이적으로 모두가 죽어야 했을 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레위인은 이스라엘의 첫 사람을 대신하는 존재로 이스라엘의 인구 수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내에 레위인은 있지만 없는 것이고 없지만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내에 레위인은 한 지파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의 자식이요, 모든 지파의 가족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유월절의 의미가 희석되고, 유월절을 인정하지 않으면 레위인은 이스라엘과 상관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레위인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과 뜻으로 사는 것이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신을 위한 것임을 인식하게 하셨습니다.

 

 

2. 성막 봉사

레위인은 생존을 위한 토지를 갖지 않고 성막에 봉사합니다. 외형적으로는 이스라엘이 성막과 레위인을 보호하는 듯한 형상이지만 실제로는 성막과 레위인이 이스라엘을 도와주는 장치입니다. 레위인은 열두 지파와 비교하여 특별한 대접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대리권자로 임명된 적이 없기에 사죄의 권한이나 면책권이 없습니다. 백성들 위에 군림할 수 잇는 어떤 권력도 허용되지 않으며 백성들과 구별되는 신성한 위치를 부여받은 적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열방과 다른 것이 없는 것과 같이 레위인도 백성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안식일에 이스라엘 백성이 일하지 않음으로 삶의 근거가 인간의 수고가 아닌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듯, 레위인은 생업이 없어도 하나님을 인정하는 이스라엘의 고백으로 레위인을 생존하게 함으로 이스라엘의 신앙을 확인하는 시금석 같은 존재입니다.

 

 

3. 종교와 생활

이스라엘은 종교 공동체가 아닙니다. 비록 성막, 법궤, 제사장, 절기, 제사 등 종교제도가 있지만 종교 제도로 운영되는 집단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주어졌고, 종교 제도에 의해 추가적인 복이 제공되거나 주어진 복이 상실되는 것이 없습니다. 제사장에 의해 지도받고, 통제받는 종교사회가 아닙니다. 이미 은혜와 복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평상시에 하나님의 토라대로 살면 복을 누리게 되고, 범죄하지 않으면 제사장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제사장의 축복의 통로도 아니요, 사죄의 책임자도 아니기에 백성들이 제사장에 대하여 존경도 두려움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제사장도 백성의 눈치를 볼 것이 없습니다. 백성들로 인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을 향한 협박도 아부도 필요치 않습니다. 백성도 레위인도 모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원리를 순종하며 살면 됩니다. 하나님을 알면 서로 감사하며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백성의 관점에서 레위인은 무위도식하는 인간으로 여겨지고 레위인의 관점에서 백성은 배은망덕한 인간으로 여겨집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은 종교제도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입니다.

 

 

 

. 자상한 하나님

 

 

1. 거룩하라 (5, 6)

인구조사를 마친 후에(1~4)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 정결을 강조하십니다.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을 위한 모든 준비는 이미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유와 평화와 안식과 행복한 삶이라는 측면에서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해야 할 준비는 달랑 한 가지 자신들의 정결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진영 가운데 유출병 있는 자와 문둥병자를 내어 보내고, 여호와를 향한 범죄를 행한 자는 속죄함을 받고, 부부관계에 대한 의심이 있을 경우 모두 해결하여야 합니다. 새로운 출발은 새로운 장소가 아니라 새로운 마음이요, 새로운 신분이요, 새로운 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백성의 예물 드림, 제사장의 봉헌, 나실인의 예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구별성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7)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봉헌도 레위인이 구별되어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나실인은 자신이 스스로 서원을 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특별하게 나실인에게 요구하는 과업이 없습니다. 나실인의 특징은 서원한 기간 동안 여호와 앞에 거룩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거룩을 어기는 일을 금하는 것 외엔 특별한 규정이 없습니다. 절대로 나실인에 대하여 강제함이나 억지로 함이 없고 언제라도 스스로 중단할 수 있습니다.

 

 

2. 축복하라 (7, 8)

여호와는 모세에게 아론과 그 아들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도록 하십니다. 그 내용은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입니다(6:24~26)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이스라엘이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행복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수고와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의 행복을 원하시고 친히 이루어 주시는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광야 중에 머물기에 평안한 곳, 물과 초목이 풍성한 곳,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곳을 찾아야 하거나, 스스로 정지와 출발의 때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막 위의 구름을 통해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정에서 만나는 모든 상황은 예기치 못한 위기가 아니고, 이스라엘이 두려워할 일이 아니고, 직접 해결하기 위해 수고해야 하는 문제가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은 관람자가 아니요, 심판자가 아니라 친히 역사하시는 행동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고 인간이 그 은혜를 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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