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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와 각종 성경공부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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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강 출애굽기 32 ~ 40

. 죄인과 하나님 (32:1~34:35)

 

1. 죄인의 속성

12장부터 출30장까지 하나님께서 계시를 위하여 선택과 약속, 사역을 진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음을 거듭 선포하고, 하나님의 속성, 성품, 원리로 죄를 이기고 하나님께 받은 복락을 누리며 살 수 있게 하는 토라(교훈)을 주시고, 하나님에게는 전혀 필요하지 않지만 오직 이스라엘을 위하여 성막을 짓게 하시기까지 온전히 인간을 위해 사역하셨습니다. 이때까지 이스라엘은 은혜를 받았을 뿐 하나님을 향하여 행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명하신 말씀을 준행하기로 언약한 바로 후에(24:7) 모세가 성막에 관한 규례를 받느라 약간 지체되는 동안 백성들은 우상을 만듭니다. 그 동안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는 구체적인 모습이 묘사되지 않았었는데, 하나님의 토라가 주어진 직후, 이스라엘이 말씀대로 살 것을 다짐한 직후 제일 먼저 행한 일이 바로 스스로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죄인의 속성입니다.

 

2. 너희를 인도한 신, 우리를 인도할 신

기독교의 하나님과 죄인들의 우상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이미 은혜를 베푸셨는가?’ 아니면 장차 복을 줄 것인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도우시는 분이기에 먼저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종교는 인간이 먼저 행동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는 너를 인도하여 낸 여호와’(20:2, 32:4)이신 반면에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하며 자신들에게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는 신에게 신의 형상을 만들어 주며 앞으로 자신들을 인도해 달라는 청원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이루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알지 못하기에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죄인의 사고방식에 하나님의 속성, 원리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상황에 대해 하나님의 인식과 이스라엘의 인식이 다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만든 세상, 인간의 삶을 행복, 완성으로 선언하였습니다. 인간이 타락으로 죄인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기에 하나님은 계시로 죄를 이길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게 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은 치유와 회복이 된 자, 하나님의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은 모든 것을 죄적 인식, 원리로 생각할 뿐입니다. 광야는 온통 문제투성이의 현장이요, 이스라엘은 아무런 해결책이 없기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고, 자신들을 도와 줄 신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신 적이 없는데, 이스라엘은 스스로 신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 놓고 있습니다. 죄인들의 원리에는 인간이 수고, 값을 내어 놓지 않으면 불안하고 받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3. 하나님의 은혜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백성들을 하나님께 중재합니다. 인간이 사함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사랑뿐입니다. 죄인은 잘못을 고백하며 회개하지도 않고, 모세는 하나님께 용서를 조건으로 무엇인가를 행할 것을 제안하지 않고, 앞으로 자신들이 어떻게 행할 것을 서원하지도 않습니다. 죄인은 죄를 인식하지 못하며, 회개 즉 스스로 돌아설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청원하는 모세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모세의 말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강조함으로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의 속성이 목이 뻣뻣한 백성’(32:9)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신상을 만든 이스라엘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용서를 넘어 약속에 땅에 들어가게 하실 것임을 다시 선언하십니다(33:2).

하나님의 선택, 약속, 계시, 은혜들은 모두 토라(교훈)가 주어지기 전에 하나님에 의해 맹세되었습니다. 토라가 주어진 것은 율법 또는 조건이 제시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토라 준수여부와 관계없이 하나님은 토라 전과 후에 동일하게 사역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토라를 모를 때에는 죄의 원리로 살아 죄의 결과를 당하고, 토라를 받은 이스라엘이 토라를 따라 행할 때에는 평화와 자유와 행복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은 이번에도 백성이 요구하지도 않은 약속을 하시고,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보증하시며,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다’(34:6)고 선언하십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광야시절 내내, 가나안에 입성할 때까지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을 만한 선하고 의로운 행동, 토라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의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실 것이고,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인간의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실 것을 다시 맹세로 선언하십니다. 아직 광야생활도 시작하지 않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입성과 그 후의 삶에 관하여 내가 그곳의 사람들을 쫓아내리니, 너는 그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고,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여호와의 절기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34). 이스라엘의 배역에 대한 징계, 진노, 심판이나, 가나안에서의 충성의 요구가 아니라 백성들의 행복한 삶에 대한 간절함이 배어 있습니다.

 

5. 모세와 하나님

송아지 사건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하고 모세는 중재하는 모습이 나오지만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표현대로라면 모세는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진멸해 버릴 계획이고, 모세에 의해 하나님이 변화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잊지 않으셨고, 계획을 변경하지도 않습니다. 모세의 말을 듣고 뜻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 제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동을 바꾸기를 기대하는 모습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실상 모세는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33:16),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33:18)등 연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하매 (35:1~40:38)

 

1. 백성을 위한 성막

출애굽기는 스토리적으로 하나님의 장엄한 사역이 소개되기도 하지만, 문학적으로도 매우 치밀한 구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계시사역이 죄인들의 개념을 완벽하게 무너뜨릴 수 있도록 치밀하게 전개된(1~18) 후에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토라가 인간의 삶을 세밀하게 가이드해 줍니다. 그리고 인간이 성막을 요구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성막을 지을 것을 말씀하시고 그 말씀이 진행되는 중간에 송아지 신상 사건이 발생합니다.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시간에 하나님과 죄인은 각각 전혀 다른 종교 양상을 펼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막아주지 않았다면 금송아지를 둘 신전(성막)을 만들고, 종사를 종교 봉사자를 세우고, 종교적 절차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언급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려는 성막, 절기, 제사 등의 규례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인간의 종교 제도가 무익함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이 먼저 인간들이 만들어낼 종교 제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성막을 제안하신 것이 절대로 하나님이 성막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님을 송아지 신상 사건을 통해 확인되는 구조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또 다른 신을 찾을 것이 뻔하기에, 또한 앞으로 광야의 삶 가운데 만날 모든 현상 가운데 두려움에 빠져 배역할 것이 뻔하기에 하나님은 친히 백성들 가운데 성막으로 임재 하시어 백성들의 불안요소를 제거해주고 하나님의 동행함을 증거 하시려는 것입니다. 성막이 하나님의 처소를 예비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위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에 걸맞게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 필요에 맞게 지어집니다.

 

2. 안식일을 중심으로

성막에 관한 내용은 준비부분(25~31)과 제작부분(35~40)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간에 금송아지 사건(32~34)과 관련된 부분을 빼면 성막의 준비부분의 끝(31:12~17)과 제작부분의 시작(35:1~3)이 모두 안식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을 중심으로 앞과 뒤에 성막관련 기사가 배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막이 독자적으로 신성한 장소나 신비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안식일의 의미와 연관되어 있고, 안식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일하심을 의미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제정하신 성막, 절기, 토라 등은 그 자체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것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였을 때에 성막을 소중히 다루지 않았습니다. 후에 성전이 지어져 성막을 대체하였을 때에는 성전이 소실되기도 하였습니다. 성막이 없다고, 성전이 무너졌다고 하나님이 거하실 곳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법궤가 사라지고 성막에 대한 언급이 없고, 성전이 파괴되었어도 여전히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계셨고, 이스라엘을 위해 은혜의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성막과 관련된 제도의 핵심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3. 성막을 짓는 사람과 재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성막을 지은 후에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신 후에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동행해 주셔야 한다고 요청한 사람들에 의하여 지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권세와 위엄에 눌려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에 감동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즉 자원하는 자들, 스스로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는 자들, 기꺼이 하나님을 맞이하는 자들에 의해 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아마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들 중에 성막을 가장 반가워했을 것입니다. 죄적인 생각에 성막이 존재해야 절기와 제사 등 다른 말씀들이 활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송아지 형상을 위해 제물을 바쳤듯이 자신들에게 가장 필요한 성막이기에 기꺼이 예물을 바쳤을 것입니다. 성경은 성막을 짓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영을 충만하게 하시고(31:2), 지혜로운 마음을 주시고(31:6), 직접 세우셨다고 강조합니다.
외형상으로는 이스라엘이 송아지 형상을 만드는 것과 성막을 짓는 것이 유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본질적 차이점을 계속하여 강조합니다. 어쩔 수 없이 죄인의 수준에 맞추어 하나님께는 필요하지도 않는 성막을 짓지만 죄인들의 사고방식에 합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과 계시가 담겨지도록 하십니다. 사람이 짓지만 기술있는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을 영을 주신 사람이 짓고, 금과 은과 보석과 각종 실이 동원되지만 인간의 기준에 근거한 비싸고 화려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책임지는 광야 생활 중에 가장 불필요한 재료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생각에 자신들이 성막을 짓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지으시는 것입니다. 후에 왕이 세워지는 과정도 유사합니다. 하나님은 왕이 필요 없지만 이스라엘은 왕을 세워달라고 합니다. 죄인들의 수준에 맞게 어쩔 수 없이 왕을 세워주지만 사람이 요구한 왕과 하나님이 세우시는 왕의 차이점을 강조하여 주십니다. 외형상으로는 동일한 왕이지만 내용적, 의미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왕의 개념, 기능, 역할이 내포되어 있게 됩니다.

 

4. 여호와의 영광

출애굽한지 둘째 해 첫째 달 초하루에 성막이 세워지고(40:2, 17), 열넷째 날에 유월절을 지킵니다(9:5). 성막에서 하나님이 주체자이시고 인간이 수혜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백성 가운데 임하는 것이요 백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는 애굽의 왕을 위해 인간이 성을 건축하는 노역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성막을 건축하는 사역으로 마무리됩니다. 하나님과 죄인의 대표인 왕이 인간을 대하는 자세를 극명하게 대조해줍니다. 하나님은 성막으로 임재하심을 증명하실 뿐만 아니라 성막위에 구름이 있어 떠나야할 때, 머물러야 할 때에 맞추어 정확하게 백성들을 인도하고, 머물러야 할 장소까지도 도와주십니다. 또한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으로, 밤에는 여호와의 불이 그 구름 속에 있어 모든 백성으로 똑똑히 보고 알게 하고 자세히 그들을 이끌어주십니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과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더불어 평안을 누렸을까요? 만약 누리지 못했다면 누구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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