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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날짜 2025-11-09

 

 

 

 

 

 


아래의 URL을 클릭하시면 유튜브 영상으로 설교시청이 가능합니다.

 

https://youtu.be/RP0ERZR9G1A

 

 

 

 

 

[창세기 강해 18] ‘피하여, 두려워하여, 숨은지라

 

. 세상이야기, 사람이야기

 

1. 세상, 저 세상

세상의 관심은 오직 새로운 세상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고 각양의 아이디어를 내고, 각양의 제도와 장치를 개선하고, 각양의 편의 시설을 개발하고, 각 분야에서 각양의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이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하는 삶의 근거이기에 어떻게든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수고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어느 종교에서는 현재에 별로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고,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이 땅에서의 삶은 잠시 지나가는 것이고, 이 생을 마감하면 다른 생이 시작되고, 다른 생에서는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서 살게되고, 그 생이 끝나면 또 다른 생이 시작되고, 결국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기에 마치 이 세상이 전부인 양 몰두하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우리의 본향은 이 세상이 아니라 천국이고, 그래서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면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정리해보면 일반 사람들은 세상이 하나뿐이라고 생각하고, 어느 종교는 세상이 여러 개로 계속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기독교는 세상이 두 개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2. 창조, 새 창조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하늘에 대해, 땅에 대해, 육지에 있는 짐승에 대해, 공중에 있는 새해 대해, 바다에 있는 물고기에 대해, 하늘에 있는 광명체들에 대해, 들판에 있는 채소와 나무들에 대해, 그리고 인간에 대해 이렇게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에게 알맞은 특성을 부여하셨고, 서로 어울리고 조화를 이루어 인간이 살아가기에 최상, 최고, 최적의 세상이 되도록 적절한 기능과 역할과 질서들을 부여하셨고,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세상은 아무 이상없이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말고 다른 것을 말할 이유가 없고 근거도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 따로 어딘가에 다른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내용이 없고, 이 세상이 본향이 아니라고, 여기는 잠깐 지나가는 곳이라고 할만한 다른 세상, 더 나은 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신 적이 없고, 소개해 주신 적이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운영하시는데 하나님이 관리를 소홀이 하셔서 문제가 발생했거나, 노후에서 하자가 발생한 적이 없고, 어느 누가 하나님의 사역을 가로 막고 세상을 망쳐 놓은 경우가 없으니까 세상이 변했다, 세상이 나빠졌다, 세상에 문제가 많다고 말할 이유도 없고 내용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것입니다.

 

3. 사람, 새 사람

그러므로 성경은 세상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삶, 자유롭고 평안하게 사는 삶, 서로 더불어 기쁘고 즐겁고 신나고 화목하게 사는 삶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멍청한 말이 하나님이 먼저냐? 인간이 먼저냐?’이고, 가장 어리석은 말이 하나님을 영광을 구하랴? 인간의 영광을 구하랴?’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누가 우선이냐를 따질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당연히 인간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애초에 비교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과 인간을 경쟁 상대로 여기지도 않고, 비교 대상으로 삼지도 않고, 우선 순위를 논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인간 중에 어느 쪽을 선택하라는 패턴을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전적으로 인간을 위해 일해 주시는 분, 인간의 편을 들어주시는 분, 인간을 응원해 주시는 분,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시는 분입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계시하는 책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에 관한 내용은 모두 인간을 위해 일하는 내용, 인간이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 속상해 하는 내용,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내용입니다.

 

. 피하여, 두려워하여, 숨은지라

 

1. 인간의 반응

창조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와 같은 하나님의 반응이 나옵니다. 일을 하신 하나님의 반응보다,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반응보다 은혜를 받은, 복을 받은 인간의 반응이 더 크게, 더 리얼하게, 더 감격스럽게, 더 역동적으로 소개되기를 기대했는데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보았을 텐데 아무 말이 없고, 하나님이 주신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를 먹어보았을 텐데, 최소한 감사하다는 말을 하거나, 감사한 표정이라도 지어야 하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다가 인간이 처음으로 반응하는 것이 남자가 여자를 만났을 때입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에게는 어떤 표현도 하지 않고 오직 여자에 대해서만 감탄을 합니다. 왜 창1, 2장은 인간의 삶에 대해 소개를 하지 않았을까? 유일한 설명이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입니다(2:25). 과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의 삶을 소개하는 표현으로 이것이 최선이었을까요? 이 표현이 정말 멋진 표현인데 우리가 실감을 못하는 것일까요? 이 표현 속에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아주 심오한 의미가 담겨있는 것일까요?

 

2.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인간의 생각, 자세, 태도, 행동 등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뀌어지는 것이 창3:6, 7절로 성경은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은 다음에 발생한 결과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를 가장 먼저 소개합니다.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는데 하나님은 아직 나타나지도 않았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어떤 심판도 없었고, 어떤 징계나 형벌의 조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에 아주 커다란 변화가 생긴 것에 대해 성경이 소개하는 너무나 달라진 변화, 인간에게 너무나 큰 불행을 대표로 소개하는 설명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입니다. 창조 때에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수고하셔서 은혜로, 선물로 인간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의 패턴, 삶의 방식, 삶의 제도, 삶의 원리가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에 담겨있는 의미는, 이제 인간이 필요를 느끼고, 인간이 스스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을 멈추신 것이 아니고, 공급을 중단하신 것이 아니고, ‘이제부터 네 문제는 네가 해결하라고 떠넘기신 것이 아닌데 인간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나섰다는 것입니다. 이 행동이 삶에 대한 인간의 생각, 사고, 기준, 원리, 개념, 가치, 방식 등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모습입니다.

 

3. 피하여, 두려워하여, 숨은지라

인간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을 잊었고, 하나님이 인간을 삶을 살피고 돌보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는 사실을 잊었고,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수고하시고 애쓰신다는 사실을 잊었고, 이제 인간의 삶이 하나님이 주신 복락을 누리며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게 되었고,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는 것처럼 살게 되었고,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살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즉 인간이 왜 이렇게 행동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내용이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3:8),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3:10)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야 할 어떤 위협적인 자세와 태도를 보이신 적도, 행하신 적도 없는데 인간이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두려워하여 숨은 것입니다. 어쩌다 보니 숨은 것처럼 된 것이 아니라 아주 의도적으로, 아주 능동적으로, 아주 적극적으로 자기가 하나님을 피하고, 숨어서, 감추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오해하면, 하나님을 모르면 이렇게 인간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고, 힘들고 고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