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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강해 6] ‘예수를 보니’
Ⅰ.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1. 자격 vs 은혜
성경에서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을 구원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는 장면이 없습니다. 구약에서 늘 하나님이 먼저 사람을 찾아오셨는데 그 사람을 면접하지 않고, 점검하지 않고,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 예수님도 사람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병자여도, 이방인이어도, 여자여도, 온 동네에 죄인이라고 소문이 난 사람이어도, 심지어는 십자가에 매달린 행악자여도 예수님은 치유를 해 줄까 말까 고민하지 않으셨고, 어느 누구도 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일꾼을 찾은 것이 아니었고, 예수님의 사역을 대행할 사람을 선발한 것이 아니었고 오직 예수님이 자신이 사역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와 타종교를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가 ‘인간의 자격 vs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 규정, 법
구약의 하나님과 복음서의 예수님의 사역원리는 은혜입니다. 복음서에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원리와는 전혀 다른 기준과 원리와 방식으로 운영되는 다른 종교, 유대교가 등장합니다. 유대교가 하나님이 주신 말씀, 하나님의 토라를 법, 규정으로 오해하여, 법이나 규정을 준수했는지의 여부에 따라 그 사람의 자격이 결정되고, 그 종교 행위에 정당성이 부여된다고 왜곡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할 때마다 나타나서 ‘이 사람에게 행하는 것이 합당하냐?’고 따지고, ‘이 날에 행하는 것이 합당하냐?’고 시비를 걸고, ‘이렇게 하는 것이 합당하냐?’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법이나 규정이 아닌 근거 첫째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이 법이나 규정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둘째, 만약 여호와의 말씀이 규정이나 법이었다면,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법이나 규정을 준행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유대교의 주장처럼 예수님이 자격이 없고, 예수님께 나아 온 사람들도 자격이 없다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역은 단 한 번도 막힌 적이 없습니다. 유대교가 주장하는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유대교가 강조하는 적절하지 않은 날에, 유대교가 시비 거는 합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진행되었음에도 예수님의 사역은 언제나 이루어졌습니다. 유대교는 자기들이 틀린 것을 대략 3년 동안 목격했으면서도, 예수님과 대화를 하면서 자기들의 논리로 예수를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으면서도 자기들이 틀린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도리어 예수를 죽여 버리는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이것이 죄인들의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질 수 없고, 죄인들이 하나님의 기준과 원리와 방식을 따를 수 없습니다.
3.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나님의 방식과 유대교의 방식, 죄의 방식은 언제나 충돌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갔을 때 성령이 임했고, 사람들이 방언을 했습니다. 이 일에 대해 예루살렘 성도들이 규정을 들어 베드로를 비난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설명하고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고 하였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고 하여 갈등 상황이 종결되었습니다(행10~11장). 유대교와 예수님의 충돌은 결코 해결되지 못했는데, 제자들 간에 발생한 충돌이 쉽게 해결된 것은 제자들이 모두 은혜를 받은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제자가 된 것, 사도가 된 것, 성령을 받은 것 등 모든 것이 자기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보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은혜였다는 것을 인정했기에 가능했습니다.
Ⅱ. 예수를 보니
1. 장차 올 세상
기독교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셔서 그 결과를 인간에는 주는 방식을 은혜라고 하고, 그 내용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수고해서 자격을 성취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노력해서 상을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일하셔서 복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일하신 것이 있고, 인간은 일한 것이 없기 때문에 기독교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5절의 ‘장차 올 세상’은 종말이나 재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강조하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의 마음과 심정과 원리와 방식과 능력으로 살아라’, 당연히 현재입니다. 육체를 따라 살지 말고 성령을 따라 살면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고 합니다. 바로 ‘오늘, 여기서’입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하셨으니 이루어진 것을 누리며 사는 것이 성도의 본분입니다.
2. 만물을 그 발 아래에
5절은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8절은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로 누구에게 복종하게 하느냐는 대상으로 ‘천사 vs 그 즉 아들’이 대조가 되어 천사에게가 아니라 아들에게 복종하게 하셨다고 강조했습니다. 무엇을 복종하게 하느냐 내용은 5절에서는 ‘장차 올 세상’이라고 나오고 8절에서는 ‘만물’이라고 나옵니다. 장차 올 세상은 시기가 아니고, 당연히 종말이나 재림이 아니라 예수가 지은 모든 세계 즉 만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한 것이 아니라, 만물을 그 즉 아들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입니다(2:8). 만물을 아들에게 복종하게 했다면 실제로 지금 만물이 그에게 복종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다른 표현으로 하면, 아들 즉 예수가 만물 위에서, 모든 만물을 무릎을 꿇고 복종할 때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웅장한 모습으로, 가장 권위있고 존귀한 모습으로 통치하고 있어야 하고, 저와 여러분은 그런 예수를 바라보고 있어야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것은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2:9)입니다.
3. 예수를 보니
기독교가 예수는 왕, 그것도 그냥 왕 정도가 아니라 만왕의 왕이라고 하면서, 전능하다고 하면서,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라면서 왕이신 예수, 권세자이신 예수의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이 못하시는 것이 아니고, 권세를 부릴 줄 몰라서가 아니요, 가진 것이 없어서도 아니요, 안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영광의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기본은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다’라는 사실입니다. 타종교의 신들이 으리으리하고 번쩍번쩍 한 것은 일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 자체가 그 신은 일하지 않는다, 그 신은 인간을 종으로 부린다는 증거입니다. 복장부터가, 거주지부터가 일하려는 마음이 아예 없는 것입니다. 자기 치장, 자기 과시에만 집중할 뿐 상대에 대한, 인간에 대한 존중도 없고, 배려도 없고, 수고도 없고, 열심도 없고, 은혜와 관련된 어떤 행동, 어떤 태도, 어떤 자세, 어떤 마음이 단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4.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은 이미 신이니까, 굳이 자기를 위하는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는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평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가장 집중해서 하시는 일은 인간이 죄를 이기고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게 살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최우선적으로, 가장 열정적으로 행하시는 것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 맛보려 하심이라’(2:9),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2:10)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품격이요, 세상을 창조하신 이의 책임감이요, 인간을 주관하시는 자의 역할이십니다.
는 것이 마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