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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강해 11] ‘참여한 자가 되리라’
Ⅰ. 시험하고 증험하여
1. 존재와 상태
기독교에서 구원을 받는 것, 성도가 되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사람의 출신, 인성, 능력, 자격, 조건, 행동 등 어느 것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일단 존재적으로 성도가 되고, 다음에 성도로서 성도다워져 가는 것입니다. 설령 성도답지 않거나, 죄인보다 더 망나니 같은 행동을 할지라도 성도됨이 취소되지 않습니다. 성도로서 미성숙한 것에 대해 ‘참 성도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냐?’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 대해서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복음,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하고, 내용이나 원리가 맞지 않으면 ‘다른 복음’이라고 냉철하게 선포합니다. 대신 성도에 대해서는 성경 어디에도 ‘그는 성도가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왜곡된 내용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 연약한 성도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난하는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2. 그의 음성을 듣거든
1장은 ‘하나님이 아들을 통하여 역사하셨다’, 2장은 ‘그 아들이 십자가 사역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한 형제가 되게 하셨다’, 3장 전반부는 ‘그리스도와 우리는 하나님의 한 집안 식구이다’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설명할 뿐 구원받은 사람에 대한 설명은 한 구절도, 한 마디도 없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구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성도에 대한 권면에서(3:7~11) 중요한 것은 ‘그의 음성을 듣거든’(3:7, 15, 4:7)입니다, ‘음성’은 단순히 목소리가 아니라 음성에 담긴 하나님에 대한 내용, 음성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이 사역하신 내용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이 하나님에 대해서 또는 하나님의 행하신 사역에 대해서 선포하는 것이 전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셔야 인간이 들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먼저 일하시고, 하나님이 먼저 결과를 만들어 내셔서 인간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고, 인간은 이 기쁜 소식, 복음을 듣는 것입니다.
3. 시험하여 증험하고
7~11절은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 하나님을 시험하고 증험하려한 것은 죄인으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백성들의 태도와 행동에 하나님이 당황하며 분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불쾌하게 졸지에 백성들에게 시험을 당한 것이 아니라 아주 의도적으로 자신을 시험대에 올려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으시려고 직접 다양한 모습으로 사역하신 것입니다. ‘내가 신뢰할만한 지, 내가 의지할만한지 나를 점검하고 테스트하고, 시험하고 증험하여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능력은 좋은데 심뽀가 고약하면 안 되니까, 재주는 많은데 변덕이 심하면 안 되니까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인격에 대해서도 확인을 해 보라고 자그마치 40년간 아주 신실한 모습을 입증해 주신 것입니다. 지구상에 있는 신이라고 여겨지는 존재들 중에 오직 하나님만 이런 계시를 행하신 것입니다.
Ⅱ. 참여한 자라
1. 알지 못하는도다
인용구절의 핵심은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나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가 아닙니다. 구약의 모든 내용,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계시 사역의 결론은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3:10)입니다. 구약의 결론은 ‘죄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죄인은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다른 표현으로 ‘하나님이 해결해 주셔야 한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 한다.’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행동에 불쾌해서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3:11)고 화풀이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죄인에 대해 무지하시다면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이 죄인들의 거역함이나 완고함에 대해 마음 상해하시면 인격적인 분이라는 표현도 사용할 수 없고, 또 하나님이 죄인들의 행동에 발끈하셔서 맹세를 취소하고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해 버리시면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역을 하셨고, 어떤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사실이고, 이어서 하나님이 그 사역이나 말씀을 행한 이유와 목적을 점검해야 하고, 이어서 어떻게 그 다음 사역이나 말씀과 연결되는 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2. 참여한 자가 되리라
인용구절(3:7~11)과 권면구절(3:12~13)의 내용이 유사하지만 히브리서는 구약을 인용하며 구약 때처럼, 이스라엘이 했던 것처럼 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이 죄인, 아직 죄에서 구원받지 못했기에 7~11절과 같은 현상, 그런 결론이 났던 것입니다. 구약을 인용한 목적은 그들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고, 그들이 완고했다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꾸중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행동해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조롱하는 것이 전혀 아니고, ‘그들은 죄인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너희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3:12)은 ‘성도들아’,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아, 하나님의 집안 식구가 된 사람들아’입니다. 구약과 히브리서 사이에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있었고, 그 열매가 바로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 7~11절을 행한 죄인들과 달리 ‘새로운 피조물’인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3:14)입니다. ‘너희는 구약의 이스라엘과 차원이 달라, 너희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의 결과요 열매야, 너희는 이미 하나님의 가족이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와 있는 자야!’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맹세
하나님이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고,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하나님의 순서요 절차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들의 사역 즉 십자가 사역 이전과 이후의 차이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성도는 전혀 다른, 새로운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권면과 동일한 권면을 한다면 아들의 사역을 부인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15~18절이 표현만 다른 뿐 내용은 7~11절과 유사하기에 19절의 ‘믿지 아니하므로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를 결론처럼 강조하는 실수를 합니다. 특히나 11절에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와 같이 하나님이 맹세까지 하셨다고 강조하는 실수를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 맹세를 하셨으면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 가나안에 보내려고 모세를 찾아오셨고, 열 가지 이적과 기적도 행하셨는데 중간에 백성들이 하나님이 기대하신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약속을 깨버리면 됩니까? 이전의 맹세는 모두 무효로 하고 새로이 맹세를 하면서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한다면 말이 됩니까? 하나님이 하신 맹세를 하나님이 어기면서, 새로운 맹세를 하면 그 맹세는 믿을 만합니까? 자기가 한 맹세를 스스로 파기면서, 내가 새로운 맹세를 하고, 이 맹세는 반드시 지킨다고 하면 그 맹세를 신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처음과 다른 새 맹세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 맹세를 끝까지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입니다.
4.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브리서 기자는 배교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성도라고, 너희는 하나님의 집안 식구라고, 구약의 백성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라고, 그것을 이룬 분이 아들이라는 것을 바르게 알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3:1)는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예수를 바르게 생각해야, 아들 예수를 바르게 알아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십자가 사역을 바르게 이해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할 때 우리의 자세, 우리의 태도, 우리의 행동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