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URL을 클릭하시면 유튜브 영상으로 설교시청이 가능합니다.
https://youtu.be/gSZEAt3WkCA
[히브리서 강해 15] ‘올렸고, 얻었느니라’
Ⅰ. 하나님의 말씀은
1.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은 ‘거룩한 여호와’ 즉 모든 죄적인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에 대해서 기본이 다르고, 본질이 다르고, 개념이 다르고, 원리가 다르고, 방식이 다르신 분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세상에서 유사한 사례, 인류 역사에서 언제, 어디서, 누구에서든 비슷한 경우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흉내를 낸 적이 없고, 모방을 한 적도 없고, 표절을 한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계시 사역을 하셨는데 타종교는 신이 신비주의적 자세를 취하기 때문에, 알려지면 수준이 낮다고, 공개되면 신비감이 줄어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늘 숨어있고, 모든 것이 비밀이고, 신이 자기의 뜻을 말해주지 않고 도리어 사람들에게 알아보라고 할뿐 자기를 소개하거나 공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를 위해 정말 다양한 종류의 사역을, 다양한 패턴으로 풍성하게 보여주고 알려주셨지만 결과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2. 너희가 믿느냐?
구약과 복음서에서 확인이 되듯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도 죄인이 하나님을 알아차리지를 못합니다. 죄인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라, 묵상하라, 연구하라, 고민하라, 찾으라, 구하라, 이해하라, 배우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대신 기독교에서는 타종교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 아주 독특한 표현을 사용하는데 바로 ‘믿음’입니다. 구약에는 믿음과 관련된 표현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게시 사역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계시 사역의 결과로 죄인들은 하나님을 배우지 못한다는 것, 어떤 설명, 어떤 이적과 기적을 보여주어도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확인이 되었을 때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사용하기 시작한 단어가 바로 ‘믿음’이요, ‘너희가 믿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등과 같은 표현들입니다. 예수님이 ‘믿음’을 언급하신 것은 우리에게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신 것이 아니고, 믿느냐고 질문하신 것이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저들이 죄인이라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영’이 없었습니다. 반드시 계시를 해서 죄인들에게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복락을 누리고 살게 해 주고 싶은데,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계시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내가 해결해 주겠다’, ‘네가 할 수 없는 영역이니까 내가 해 줄게, 내가 가능하게 해 줄게!’라는 의미로 ‘믿음’이 등장한 것입니다. 믿음은 ‘네가 믿느냐?’고 죄인을 검증하는 질문이 아니라 ‘내가 해줄게!’라는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은 옛적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일하시는 순서를 정하시고 그 순서대로 일하셨습니다. 그런 순서를 고민하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순서대로 일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구약에서 계시 사역을 할 때에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할 것도 이미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고, 버리고, 떠나도 당황하지도 않으셨고, 배신감을 느끼지도 않으셨고, 화를 내지도 않으셨고, 징계하거나 형벌을 내리지도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사역을 미리 예정해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직접 행하실 능력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 본문이 히4:12~13절입니다. 이 구절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표현하자면, ‘나는 너희의 전부를 다 알고 있다. 너희의 한계도, 너희의 연약함도, 너희의 속내도, 너희의 깊은 생각까지도. 또한 나는 내가 지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내가 모든 것을 주관하고 있으니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다. 내 앞에 감추인 것인 없고,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없고, 내가 하지 못할 일이 없다. 그래서 내가 너희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내 아들을 너희에게 보낸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Ⅱ. 올렸고, 얻었느니라
1. 오직 하나님의 은혜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한 후에 광야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성막을 지으라고 하시고,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제사장 지파를 세우시고, 율법을 주시고, 율법의 내용 중에 제사에 관한 것이 상당한 분량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성막이나 성전에서 율법을 따라 제물을 가지고 와서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는 것이 여호와 신앙의 모범적 모습으로 착각하십니다. 기독교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수단이나 방법, 하나님의 상이나 복을 받은 수단이나 방법,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수단이나 방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수단과 방법을 제시하신 적이 없고, 실제로 실행하신 적도 없습니다. 사사기 시대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다음에 성막으로 돌아와서 제사를 드린 적이 없음에도 하나님은 사사를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나라가 분열된 후에 북왕국에는 아예 여호와의 성전이 없고, 여호와의 제사장이 없었고, 당연히 제사도 없고 율법을 준행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북 왕국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하여 정말로 허다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호와 신앙에는 수단과 방법이 없고 오직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2. 올렸고, 얻었느니라
히5:7절에 예수님이 육체에 계실 때에 하신 일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예수님의 자세 또는 태도로 ‘그의 경건하심을 말미암아’,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가 나옵니다. 히5:8절에도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 ‘아들이면서도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다, 그래서 온전하게 되셨고, 그래서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가 나옵니다. 마치 예수님의 행동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방식, 죄의 방식, 인간들의 방식에는 변치 않는 원칙, 어느 시대, 어느 지역, 어떤 인물, 어떤 상황에도 늘 적용되는 만고불변의 진리는 ‘땀을 흘려야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수고, 노력이 있어야 결과, 열매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세상의 방식이 하나님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을 소개하는 방식이 예수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어떤 사역, 어떤 역할을 소개하는 방식이 아들의 사역, 그리스도의 사역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3. 아들, 그리스도
예수가 아직 이 땅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에 구약에서 이미 예수가 강림할 것이 예언되었습니다. 당연히 예수가 아직 이 땅에서 아무 일도 행하지 않았을 때에 구약에서 이미 예수가 십자가 사역을 행할 것이 예언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 수도 없이 반복되는 표현이 ‘예언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입니다. 예수는 강림할 때부터 아들이었고,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예수는 강림할 때부터 아들의 사역, 그리스도의 사역을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는 강림할 때부터 아들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다 이루어, 성취하신 후에 승천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는 일단 태어나신 후에 예수의 행동, 예수의 수고, 예수의 노력, 예수의 자세와 태도에 근거하여 아들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일단 육신을 입은 후에 예수의 성품, 예수의 마음, 예수의 헌신, 예수의 충성, 예수의 희생 등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로 선발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일단 이 땅에 머물 때에 예수의 심한 통곡, 눈물, 간구와 소원,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 들으심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일단 예수의 고난에 근거하여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일단 삼년 동안 성실히 생활한 공로를 인정받아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기에 아들의 삶을 사셨고, 그리스도로 오셨기에 그리스도의 사역을 하셨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으로 예언되셨기에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고, 애초에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으로 오셨기에 그에 합당한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 순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