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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강해 18] ‘이보다 더 좋은 것’
Ⅰ. 타락한 사람은
1. 타락한 사람은
구약에는 하나님이 행하신 사역들이 주로 기록되어 있고, 신약에서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들이 풍성하게 기록되어 있고, 서신서는 말 그대로 서신, 편지라서 구약의 내용과 신약의 내용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이 나오다가, 구약의 연장선상에서, 구약의 하나님의 사역의 패턴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행하는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서 어느 정도 구약과 신약이 연결되어서 해석의 방향성도 잡히고, 일관성도 있게 되어집니다. 그러다가 서신서로 가면 구약에서 확인되고 복음서에서 확인되고 사도행전에서 확인된 내용을 글로 표현하니까 가장 납득할 만하고, 가장 동의할 만한 단계에 이르는 것이 정상입니다. 만약 구약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 복음서에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에 대해 충분한 이해, 바른 이해, 납득할 만한 이해를 하지 않으면 서신서의 본문들에 대한 무익한 논란들이 발생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히6:4~8절입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할 수 있습니까? 구원이 취소될 수 있습니까?
2. 하나님의 선택
만약 타락할 수 있다고 해도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만, 인간이 연약하여 누구라도 실수할 수 있고, 또 죄가 아주 교활하게 수작을 부려서 미혹에 넘어갈 수도 있지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감사한 일인데 본문은 아예 단정적으로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초를 바르게 알고 있다면, 구약의 하나님의 사역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면 이것은 애초에 질문 거리, 논란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기독교와 관련해서 사람들의 최대 관심거리는 ‘누가 구원을 받는가?’, ‘어떻게 또는 무엇을 하면 구원을 받는가?’이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은 이것을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이 행하신 행동, 하나님이 행하신 사역이 ‘선택’입니다. 모든 오해는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죄인들 중에 어떤 사람을 선택했다는 것 즉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중에 일부만 대상으로 삼았다고 오해하기에 다음 오해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왜 선택하셨을까? 선택받기 위한 인간의 자격과 조건이 자연스럽게 등장합니다.
3. 하나님의 사역
그러나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정말로 단 한 번도, 단 한마디도 왜 그 사람을 선택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신 적이 없고, 근거를 제공해 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그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에게 선택받을 자격이나 근거가 없었던 것과 똑같은 패턴으로 선택이 취소될 자격이나 근거도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면 선택받는다는 언급이 없었던 것과 같이, 무엇을 하면 또는 무엇을 하지 않으면 선택이 취소된다는 언급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행동은 전부 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취소되지 않았고, 백성들이 살면서 혹시나 하나님의 백성에서 쫓겨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고 염려하고 두려워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의 행동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행동하고, 하나님의 사역이 취소되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Ⅱ. 이보다 더 좋은 것
1. 선발이 아니라 선택
가장 기초적인 것, 하나님의 선택은 허다한 죄인들 중에 특별히 몇 사람을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죄인들을 대표해서 ‘샘플’로 삼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기에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기에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누구를 사역대상으로 삼은 적이 없고, 특별히 누구는 사역 대상에서 제외하신 적이 없습니다. 성경이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사랑하신다, 모든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여호와’라고 하는 것은 다른 신이 없기에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다른 신에게 맡길 수가 없고, 모든 인간을 하나님이 책임지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는 세상의 누구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니까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했으니까 어떤 죄인은 제외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죄인, 저런 죄인 모두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은 모든 인간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샘플’입니다.
2. 이보다 더 좋은 것
하나님이나 예수님은 말씀하신 적이 없는데 유대교에 속한 사람이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했고 대답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였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선택이 취소되는 적이 없고, 하나님의 사역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 그런 사례가 없습니다. 그래서 히6:4~8절은 ‘이 정도에서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는 의미나 내용이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앞인 6:1~3절에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가 있다, 다른 것으로 대체할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를 추가할 것도 아니고, 새롭게 다시 해야 할 것도 아니라고, 하나님이 옛적부터 지금까지 행해오신 사역으로 충분하기에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강조했었습니다. 본문의 뒤인 6:9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입니다. 앞에 너무나도 명백한 선포를 해 놓고, 다음에는 전혀 엉뚱한 반전의 내용을 길게 표현하고, 그 다음에는 다시 반전을 반전시키면서 원래의 명백한 선포를 다시 한 번 확실하게 쐐기를 박은 것입니다. 히6:4~6은 불가능한 일을 최대로 극대화시킨 것입니다. 절대로 발생해서는 안 되는 일이 마치 발생하기라도 한 듯, 그래서 정말 아무 대책이 없고, 모든 것이 끝장 난 것처럼 표현한 것입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움을 느끼도록, 인간이 가장 절망을 느끼도록, 인간이 가장 불안과 염려에 사로잡히도록 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 내용을 전개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가장 위대한 희망, 가장 행복한 내용, 모든 것을 다 뛰어 넘을 수 있는 가장 기쁘고 복된 소식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어떤 사람이 6:4~6절같이 살벌한 말을 하더라도, 혹시 6:7~8절처럼 행한대로 갚는다고 주장할지라도 전혀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말들보다, 그런 주장보다 더 분명하고, 더 확실하고, 더 좋은 것들이 있다는 것 즉 ‘우리가 구원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3. 구원에 속한 것
인간을 주어로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하면 당연히 ‘우리가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이 나오고 하나님을 주어로 ‘하나님이 구원하셨다’고 하면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느냐’라는 질문이 나오고, 그 대답이 첫 번째가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히6:10~12), 두 번째가 ‘하나님의 맹세(히6:13~20)입니다. 기독교는 이렇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사역의 모든 원인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인간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모든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의 사역의 원인, 이유, 근거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마음으로만 설명이 가능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구원을 선포하는 종교입니다. 인간에게 구원받았느냐고 질문하는 종교가 아니고, 이렇게 하면 구원받는다고 제안하는 종교가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셨다고, 너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포하는 종교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을 풍성히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