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URL을 클릭하시면 유튜브 영상으로 설교시청이 가능합니다.
https://youtu.be/jnkJiTs8rCE
[히브리서 강해 19]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
Ⅰ. 본 받는 자
1. 이전 것, 새 것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각자의 기준에 따라 사람을 구분해서 헬라인은 지식인과 야만인으로 구분했고, 로마인은 시민과 노예로 구분했고, 유대인들은 선민과 이방인으로 구분했습니다. 기독교도 인간을 구분하는데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기준입니다. 기독교의 기준은 하나님으로, 인간을 ‘죄인, 의인’, 또는 ‘죄인, 성도’, 다른 표현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자,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로 구분을 합니다. 둘째, 개인이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있는데 그 사람의 어떤 수고와 노력과 열심으로 죄인을 벗어날 수 없고, 의인 또는 성도가 있는데 그 사람의 어떤 나태와 안일과 게으름과 무관심일지라도 성도는 다시 죄인이 될 수 없고 여전히 마지막까지 성도입니다. 인간이 할 수 없기에 하나님이 하십니다. 셋째, 차별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인간 구분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다른 여러 집단을 대조하는 것이 아니고, 어느 누구와도, 어느 집단과고 경쟁하여 우열을 나누는 것이 전혀 아니기에 차별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구분은 본인, 당사자, 그 한사람에 대하여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죄인’을 ‘이전 것’이라고, ‘의인’을 ‘새 것’이라고,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죄의 마음, 기준, 가치, 원리, 개념, 방식, 능력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새 것’은 하나님의 마음, 기준, 가치, 원리, 개념, 방식,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참여하는 것
기독교의 주체는 하나님, 기독교의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 기독교에서 책임을 지시는 분, 역할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에서 인간의 행동, 인간의 실천은 무엇을 이루어 내는 것, 성취하는 것, 완성하는 수단이나 방법이 아닙니다. 인간이 행동하면 이루어지고, 인간이 실천하면 성취가 되고, 인간이 수고하면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이루어 놓으셨고, 하나님이 이미 성취하셨고, 하나님이 이미 완성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열매, 하나님의 결과, 하나님의 완성이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는 행동을 함으로 성도됨을 누리는 것입니다. 성도는 실천을 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됨, 하나님 나라의 복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성도의 행동이나 실천이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행동이나 실천은 은혜받는 수단이나 복 받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복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오셨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아들을 주겠다고 선포하시기에 아브람은 졸지에 ‘아들을 얻는다’는 선포를 들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고, 하나님이 다시 약속을 해 주시기에 하나님은 ‘약속을 하신 자’이고,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은 자’ 본문으로 하면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3. 본받는 자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하여 첫째, 아브람은 하나님에게 약속을 받으려고 애를 쓴 것이 없습니다. 둘째, 약속을 받은 후에, 약속과 관련해서 아브람이 한 것이 없습니다. 본문 11절처럼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12절처럼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를 행한 적이 없습니다. 아브람이 약속과 관련하여 특별한 행동을 했다는 내용이 일체, 전혀, 아예 없습니다. 도리어 부인 대신 여종을 통해 엉뚱한 자식을 낳았고, 정작 그 부인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속으로 비웃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냥 평범한 생활,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을 살았을 뿐인데 성경은 아브라함이 부지런함을 나타내었고, 게으르지 아니하였고, 믿음과 오래참음을 했다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이고 우리가 ‘본받는 자’(6:12)인데 아브라함이 본이 되게 행동한 것이 없기에 우리가 본받을 것이 없는데 성경이 우리를 귀하게 표현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시는 자세, 태도입니다.
Ⅱ.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
1. 하나님의 맹세
하나님이 거룩하시기에 기독교도 거룩하고 기독교의 표현들도 거룩합니다. 기독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하나님이 하실 일을 알려주시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포’라고 합니다. 기독교에서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하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 즉 하나님의 역할을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하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을 ‘하나님의 성취’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이 행하실 것을 강조하고 다짐하는 것 즉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을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맹세’라고 합니다. 세상에는 이런 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다른 종교에는 이런 표현들이 없습니다.
2.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사람들도 맹세를 하지만 자기들이 예상하던 일, 자기들이 기대하던 일, 자기들이 진행하던 대로 되면 천만다행인데 조금이라도 변수가 생기면 약속도 소용없고, 맹세도 아무 의미가 없고 ‘이건 어쩔 수 없는거야!’라고 해 버립니다. 책임을 질 수 없기에 세상의 존재들은 가능한 맹세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본인이 먼저 말씀하시고, 본인이 먼저 약속하시고, 본인이 먼저 맹세까지 해 주십니다. 인간이 요구하지 않아도 먼저, 자발적으로, 스스로, 앞장서서 할 수 있는 모든 조치, 모든 장치를 다 만들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6:17)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심하지 말라’고 다그치지 않고 ‘게으르지 말라’고 닦달하지 않고 ‘믿음과 오래참음을 가지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인간이 의심하고 불안해 할 것 같으니까 ‘하나님의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즉 하나님 쪽에서 인간의 의심, 불안, 염려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일하시는 분’이고 인간은 ‘받는 자’,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부탁, 간청한 것이 아님에도 하나님이 주겠다고 뜻을 정하고, 하나님이 하겠다고 약속과 맹세를 해 주시고, 이 모든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내용을 ‘기쁜 소식’,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3.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이 하나님의 약속이고,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보증하시는 하나님의 맹세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마치 특정한 행동, 중요한 행동을 한 것처럼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구원하시기에 성도는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6:18)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피난처가 어디 있는가 열심히 찾은 것이 아니고, 피난처로 재빨리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품으시면 우리는 그 안에 피한 것, 안긴 것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맹세를 하시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6:18)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행동은 전적으로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신뢰할 수 있도록, 인간으로 하여금 안위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다양하게 수고하고 애를 쓰십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과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6:19)에서도 우리가 휘장 안에 들어간 적이 없지만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6:20)와 같이 예수가 들어가심으로 우리가 들어간 것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직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인간을 위해 열심을 다해 헌신하시며, 인간에 대해 가장 존중의 표현을 다 해 주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