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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강해 20] ‘다른 한 제사장’
Ⅰ. 하나님의 인간 존중
1. 사람들의 요구: 공평, 정의
철학이나 신학, 종교학에서 신을 주제로 토론을 하면 가장 강조되는 것은 ‘정의’입니다. 세상은 힘의 논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기에 신은 최소한, 기본적으로 정의로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래야 억울함이 풀릴 수 있다고 기대합니다. ‘신은 정의롭다’ 또는 ‘신의 공정해야 한다’를 인간에게 적용하면 ‘인간은 수고한 대로 결과를 얻는다’입니다. 각각의 인간이 서로 다른 기질, 성향, 재능, 달란트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배제하고 그저 ‘각 사람이 행한대로 갚아달라’는 말로 신에게 공평하게, 정의롭게 판단하고, 보상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매우 겸손하고 정직한 것 같은데 사실은 매우 교활하고 사악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공정, 정의’가 우선이 아닙니다. 인간이 행한 대로 보응하면 인간은 살 길이 없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이 행한대로 갚아주지 않으시고 대신 각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도움을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아도, 하나님의 수준을 따라오지 못해도, 하나님의 기대나 바람을 충족시키지 못해도 하나님은 전혀 화내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기독교의 하나님이 인간의 기준에 맞추어 주시고, 하나님이 인간의 수준이 되어 주시고, 하나님이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간 존중입니다.
2. 하나님의 사역 : 인간 존중, 은혜
기독교의 이름으로 인간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간에게 위력을 행사하는 것,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의 인권을 함부로 대하는 것, 신앙의 명분으로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행동을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그 사람이 그 행동을 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그 행동에 대해 보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을 치유할 수 있도록, 그 행동을 중단하고 새로워질 수 있도록, 그 사람을 새 사람이 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간 존중이고, 이것을 하나님의 공평, 하나님의 정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고백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 상을 받았다’는 자랑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존중함을 받은 당사자입니다. 본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존중함을 받았기에 하나님이 다른 사람도 존중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내가 하나님의 존중함을 받고 상대도 하나님의 존중함을 받은 자라는 것을 알기에 서로 존중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일, 인간의 일
기독교는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이 성취하신 결과, 복음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사역,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반복적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알아야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알아야, 그래서 나에게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 알아야 나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신서는 사도들이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복음을 설명하는 내용, 성도들에게 신앙 상담을 하는 내용, 믿음 생활 잘 하라고 권면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 내용이, 그 방식이, 그 순서가 세상의 순서, 세상의 패턴과 완전히 다릅니다. 간단히 복음을 설명한 후에 제발 열심을 내라고, 이제는 좀 적극적으로 나서서 최선을 다해 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에서 성도가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일, 가장 본질적인 일, 가장 핵심적인 일은 복음을 듣는 것, 복음을 읽는 것, 복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내 마음이 되고, 복음이 내 기준이 되고, 가치, 원리, 개념, 방식이 되어서 복음으로 죄를 이기는 삶이 가능해 지고, 복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복락을 누리는 것이 구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 대신 인간이 해야 할 일이 강조되는 순간 복음은 세상의 교훈이 되어버립니다.
Ⅱ. 다른 한 제사장
1. 멜기세덱에 관하여
멜기세덱은 창14장에 두 번, 시편에 1번, 히브리서 10번이 나옵니다. 창14장의 주요 인물은 아브라함입니다. 멜기세덱에 대한 소개는 ‘살렘 왕’,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뿐입니다. 나중에 모세나 여호수아가 멜기세덱에 대해 설명하는 것도 없고, 사무엘이나 다윗이 멜기세덱을 기념하는 것도 없고, 선지자들이 멜기세덱의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저 시편 110편에 딱 한 줄, 딱 한 번 멜기세덱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신약에서 어느 누구도 멜기세덱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과한 예언들 중에 멜기세덱과 예수님을 연결하는 내용이 없기에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과 관련하여 단 한 번도, 단 한 마디도 멜기세덱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도 멜기세덱에 대해 일체 말을 하지 않고, 서신서를 많이 기록한 바울도 멜기세덱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습니다. 딱 한 군데 히브리서에서만 멜기세덱을 언급합니다. 딱 한 군데 히브리서에서만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 소개하는데, 딱 한 군데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2. 유다로부터 나신 것
히브리서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강조하는 것은 딱 하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멜기세덱이 등장한 것이지, 멜기세덱을 설명하다가 예수가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멜기세덱을 어떻게 설명하는가를 궁금해 하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설명하는가를 주목해야 합니다. 대제사장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약에서 수 없이 반복되는 레위 지파, 아론의 후손을 떠 올립니다. 히7:4~7절에서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과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이 대조가 됩니다. 히7:8~10절에서 레위의 아들들은 죽을 자들로, 멜기세덱은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라고 대조가 됩니다. 히7:11~15절에서 11절 앞에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이 나오고 멜기세덱의 반차가 나오는데 갑자기 14절에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지파 출신이고, 유다 지파는 레위지파가 아니니까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3. 별다른 한 제사장
히브리서가 예수를 대제사장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대제사장이라고 하면 모두가 레위의 아들들, 레위 계통을 생각하는데 예수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유다로부터 나셨으니 레위족보에 들지 않았고, 레위 계통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레위 계통과 또 다른 멜기세덱의 계통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른 후손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는 ‘다른 한 제사장’(7:11), ‘별다른 한 제사장’(히7:15)이라는 것입니다. 레위 지파와는 전혀 다른 한 제사장을 세웠는데 그것을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만약 멜기세덱의 반차를 강조하려고 했으면 멜기세덱의 개통이 이어져 멜기세덱의 아들이 누구이고 그 후손이 누구이고, 그 다음이 누구이고 그래서 예수까지 이어져 와야 하는데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레위 계통과 멜기세덱의 계통을 대조하는 것이 아니고, 레위 계통과 유다 계통을 대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는 별개의 다른 한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4. 바꾸어졌은즉, 바꾸어지리니
구약도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하나님이 사역하셨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 레위를 제사장 지파로 결정한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레위기의 제사에 관한 내용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히7:11절을 끝에서부터 역으로 살펴보면, 이미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다른 한 제사장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다른 한 제사장을 세웠다는 것은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증명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약에서 행하신 말씀과 사역이 잘못되어서 ‘제사직분이 바뀌었은즉 율법도 바꾸어지리니’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서 진행되어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