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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강해 24] ‘단번에, 영원히’
Ⅰ.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1. 첫 언약에도
히9:1~5절은 성막을 설명하는데 성막은 기본적으로 울타리가 있고 그 안에 성막이 있고, 성막 안에 먼저 나오는 공간을 성소, 안쪽에 있는 공간을 지성소라고 합니다. 울타리 안 뜰에서 성막으로 들어갈 때에도 휘장을 열고 들어가기에 그것을 첫째 휘장으로, 안에 있는 것을 둘째 휘장이라고 기록했습니다(9:3). 지성소에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항아리(출16:33~34), 아론의 싹난 지팡이(민17:10), 열 가지 말씀을 기록한 돌판(출25:16)이 있습니다(히9:4). 언약궤 위에 날개 같은 것이 양쪽으로 펼쳐져 있는 것을 ‘뚜껑’, ‘덮개’라고 하지 않고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히9:5)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히9:6~7절은 성막에서 행해진 예식에 대해 설명해 줍니다. 첫 장막이 성소이고 제사장들은 이 성소까지만 들어가고, 둘째 장막이 지성소인데 이곳은 오직 대제사장만 들어가고, 그것도 일 년에 딱 한 번, 날짜로는 일곱째 달 열째 날, 절기로는 속죄일에 들어가는데 속죄일의 예식에 대하여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라고 했습니다(히9:7).
2.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첫 언약을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성막을 세우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성막에 대해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히8:5),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히9:6), ‘세상에 속한 성소’(히9:1) 즉 성막이 실체가 아니고, 본체가 아니고, 핵심이 아니고, 주축이 아닙니다. ‘세상에 속한 성소’ 즉 ‘땅에 있는 것’이요 모형과 그림자이기에 실체는 ‘하늘에 있는 것’(히9:5, 23)으로 공중에 무슨 집이 있거나, 보좌가 있거나, 공간이 있거나, 물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성소와 참 장막’(히8:2)입니다. 구약의 성막의 제사에 대한 성경의 평가, 하나님의 의도가 히9:8~10절입니다. 하나님은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고 첫 언약 즉 성막과 제사를 실행했는데 결과적으로 실패해서 새롭게, 추가적으로, 보완적으로, 2차적으로 새 언약을 급하게 만들어 내신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이렇게 계획된 것입니다. 즉 이 예물과 제사로는 섬기는 자를 온전하게 할 수 없다(히9:9)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3.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새 언약에 대한 설명(히9:11~12)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그리스도께서’ 즉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리스도께서 속죄를 이루사 성소에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종교, 예수님이 일하시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이유는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9:9)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성막의 예물과 제사를 섬기는 자, 제사장이나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대표하는 자들인데, 그들의 어떠한 종교 행위도 백성은 고사하고 당사자조차도 온전하게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죄인들은 똑같은 수준이기에 대제사장과 다른 존재가 없고, 성막의 제물과 제사조차도 그 사람을 온전하게 할 수 없다면 세상에 있는 어떤 종교의 어떤 제물이나 어떤 제사도 사람을 온전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Ⅱ. 단번에, 영원히
1.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통용되는 있는 어떠한 종교적 활동도 그 사람을 온전하게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달리 대안이 없기에 모든 종교들은 조금만 더 열심을 내보자고, 한번만 더 정성을 드리자고 희망고문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장차 오실 것이라고, 앞으로 하실 것이라고 예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셨고, 이미 예언된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밀마암아’(히9:11) 즉 성막은 모형이요 그림자였고 세상에 속한 즉 땅에 있는 것이었는데 예수는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것 즉 온전한 성막으로 오셨습니다. 성막의 제사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행했지만 예수는 ‘오직 자기의 피로’ 행하셨고, 성막은 제사는 ‘매년, 매번’ 속죄를 해야 했는데 예수는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입니다(히9:12~13). 구약에서는 약속과 예언이 나오고, 신약에서는 약속이 이루어졌고,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9장 내내, 그리고 10장 내내 예수께서 오셔서 죄 문제를 해결하셨다고 계속해서 선포하고, 확인하고, 공지하고, 강조하고, 설명합니다. 기독교는 ‘예수께서 완성하셨다’는 기쁜 소식, 복음을 선포하는 종교입니다.
2. 단번에, 영원히
9장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이 ‘단번에’와 ‘영원히’입니다.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9:14) 즉 할 수 있다, 이미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하셨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9:15)입니다. 12절에서 예수께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고, 14절에서 영원하신 성령으로 사역이 이루어졌기에, 15절에서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16, 17절의 ‘유언’은 각주에 나오는대로 원래 헬라어로는 ‘언약’인데 우리말로 ‘유언’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유언’은 사전적으로 ‘죽음에 이르러 부탁하여 말을 남김’이라는 의미로 말 그대로 마지막 말이고, 다시는 말을 못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죽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이고 소멸되는 것이고 중단되는 것이고 끝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하나님과 예수님은 살아 계신 분이고 또한 일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과거의 인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유언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나 예수님과 관련하여 유품이 있는 것이 아니고, 유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기독교는 예전에 있었던 종교가 아니고, 현재는 사라진 종교가 아닙니다. 그래서 기독교에 유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본문은 계속하여 ‘영원한, 영원한, 영원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8장부터 계속하여 첫 언약과 새 언약이 등장하고 있는데 바로 앞의 15절에도 새 언약, 첫 언약이 계속 등장하기에 원래대로 언약으로 바꾸어서 본문을 읽어보면 ‘언약은 언약한 자가 원래 언약된 대로 죽어야 되나니 언약은 그 사람이 언약대로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언약한 자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이 있었고, 그리스도는 언약대로 왔고 언약대로 죽었다가 언약대로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언약의 내용이 당연히 유효한 것입니다.
3. 언약의 피
본문에 ‘언약’이 자주 등장하는데 다른 종교에서는 언약이라는 표현을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신이 인간과 계약을 맺지 않기 때문입니다. 타종교에서 신은 절대자이고 인간은 신의 종으로 신과 인간의 격차를 강조합니다. 그런 신이 인간과 동등한 관계를 형성하지 않고, 특히나 상호간의 역할을 의무로 규정하는 계약 같은 것을 절대로 맺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인간과 계약 또는 언약을 맺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상호간이 해야 할 역할을 규정한 쌍방 평등 계약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하실 일이 있고, 인간은 받을 일만 있는 완전 불평등 계약, 무조건 인간에게 유리한 일방적인 계약으로 ‘하나님의 맹세’입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즉 죄사함을 위해서는 피흘림이 있어야하는데, 누가 피를 흘립니까? 각 사람이 피를 흘립니까? 그러면 은혜가 아닙니다. 서로 피를 흘려줍니까? 그러면 복음이 아닙니다. 인간이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피를 흘려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피를 흘리신 결과, 즉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이고, 그래서 복음이고, 그래서 기독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