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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URL을 클릭하시면 유튜브 영상으로 설교시청이 가능합니다. https://youtu.be/rumISUpPNuM

 

 

 

 

 

 

[히브리서 강해 34]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 예수를 바라보자

 

1. 하나님과 인간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신은 조물주이고 인간은 피조물이라고, 신과 인간의 격차를 강조하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하나님이 인간보다 더 높다, 더 세다, 더 크다고 강조하지 않고, 인간은 하나님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름을 받아서 하나님과 사랑과 교제를 나눌 수 있고, 사귐과 누림을 함께 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너희는 나의 백성입니다. 이때 하나님, , LORD’는 주인, 보호자, 관리자, 책임자라는 의미입니다. 남편과 아내, 부부입니다. 부부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장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주신 분, 상대를 인정하는 것과 존중하는 것의 절대적 모습을 보여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떠나면 하나님이 찾아가고, 인간이 잊으면 하나님이 기억나게 하시고, 인간이 배신하면 확 은혜를 주어서 관계를 유지하십니다. 부모와 자녀입니다. 부모의 역할, 부모의 역할은 자녀를 양육하고 돌보는 것입니다. 인간 상호간에 어떠한 관계이든 즉 남편과 아내의 관계이든,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든, 상사와 직원의 관계이든 가장 기본이 되는 것, 기장 본질이 되는 것,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 상대를 인정하는 것, 상대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2. 예수를 바라보자

성도의 할 일은 믿음의 주요 또한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12:2)입니다. 히브리서가 강조하는 것은 너희가 열심을 내라, 너희가 더 노력해라.’ 즉 인간의 태도, 인간의 행동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바라보자입니다. 예수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주체는 하나님, 예수님이고 인간은 예수님의 사역의 대상이요 열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역의 주체라는 의미로 믿음의 주라고 하고, 예수가 우리를 위해 사역을 하신다는 의미로 온전하게 하시는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2:1,2절의 기록상 의로는 먼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그 다음에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면서’, 그리고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는 순서 즉 내가 할 일이 앞에 나오고 예수는 잘 모셔두는 순서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사역의 대상, 하나님의 사역의 열매와 결실이 인간이기에 인간이 먼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록된 순서대로가 아니라 먼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즉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예수,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보고 듣고 배우고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다음으로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가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최종적으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자예수에 대해 바로 아는 것, 예수의 사역에 대해 바로 이해하는 것이기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가 나옵니다(12:2, 3).

 

.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1. 내 아들아, 사랑하시는 자

성도의 행동에 대해 4절은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에서 아직피흘리끼까지 해야 하는데, 아직 안하고 있다, 그러니까 더 치열하게, 피흘리기까지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너희가 죄와 싸우고 있다. 그렇다고 너희가 피 흘리기까지 싸울 일은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피흘리면서 죄와 싸우는 것은 이미 예수님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5절은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즉 잊지말라는 권고입니다. 권면의 내용을 파악하기 전에 말씀을 하시는 분과 듣는 분의 관계를 꼭 기억해야 합니다.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내 아들아’,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이라고 하니까 아버지나 어머니 즉 부모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부모가 되시기로 자처하셨고, 우리들을 아들과 딸, 자녀로 삼아주셨고 부모와 자녀에서 하나님이 강조하려는 핵심은 부모의 역할, 자녀를 돌보고 양육하고 공급하고 책임지고 격려하고 후원하는 부모의 역할입니다.

 

2. 양육, 돌봄

하나님이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에게 권면하는 내용이기에 히12:5~13절의 핵심은 결단코 징계가 아닙니다. 본문에 징계라고 번역된 단어 파이데이아어린이를 양육함, 교육, 훈육, 가르침입니다. ‘파이데이아의 어근이 파이듀오아이를 양육하고, 교정하다, 가르치다이고, ‘파이데이아에서 파생한 명사가 파이디온젖먹이, 애기, 어린이, 아기, 자녀입니다. ‘파이데이아징계’, ‘견책, 훈계’, ‘discipline, ‘punishment’로 번역해서 단순히 번역상의 안타까움을 넘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왜곡되어 버렸습니다. 1~11장까지 강조해온 내용이 하나님이 아들이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보내셨고, 예수는 대제사장으로서 아들들을 위해 어느 것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기꺼이 십자가 사역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의 결론이 징계일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역, 예수님의 사역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죄인들을 구원하심, 다른 표현으로 하면 자녀들을 돌보심입니다.

7절처럼 부모라면 자녀를 돌보는 것이요, 자녀는 부모에게 돌봄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사생자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이 징계를 받아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돌봄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번역상의 안타까움이 연쇄적으로 치명적인 부작용을 만들어 냈습니다. 일단 하나님이 징계하신다고 하니까 교회들이 징계를 정당화했고, 자신들의 입맛에 따라 징계를 남발한 것이 기독교의 흑역사라 할 수 있는 마녀재판이었습니다. 또 하나 가장 치명적인 부작용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은혜의 의미, 은혜의 개념, 은혜의 가치가 상실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은 것에 대해 하나님이 너무나 당연하게, 지극히 공의롭게 징계를 내렸다고 하니까 상대적으로 하나님은 인간이 선을 행한 것에 대해 너무나 당연하게, 지극히 공의롭게 상을 내렸다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을 행하면 상을 받고, 죄를 행하면 징계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요 공평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가 언급될 수 없고 또한 하나님은 은혜를 주신 적이 없게 되고, 기독교에는 은혜가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 징계를 강조함으로 인해 그 동안 해 오신 하나님의 사역을 모두 헛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불순종을 하고 죄를 범하자 하나님이 징계하셨다고 주장하면 하나님의 징계로 이스라엘이 달라진 것이 없으니 하나님은 아무런 효과도 없고, 어떤 결과물도 없는 사역을 오랜 세월 동안 수 천 수만 번을 행하신 것이 되어버립니다.

 

3.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풀어 주려는 유익이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l12:10)입니다. 인간을, 그것도 죄인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하나님의 존귀하심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에 참여하게 하신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직접 사역을 행하시어 인간에게 은혜로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계속하여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는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입니다(12:11). 성도의 삶, 신앙의 궁극적 결론이 사람 사이에 의와 평강이 드러나는 것, 행복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저와 여러분이 행복하기를 기대하시고,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도록, 하나님의 주신 은혜와 복락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친히 수고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시고, 예수를 잘 이해하시고, 예수를 견고히 잡으셔서 예수로 인해 즐겁고 신나고 기쁘고 행복한 삶을 누구든지, 항상, 범사에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