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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강해 39] ‘흔들리지 않는 나라’
Ⅰ. 그들과 같이 하지 말라
1. 주시는 이
기독교의 하나님은 신(神)이요,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자비롭고 온유하며, 모든 것이 풍성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도움을 받거나,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며,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 어느 것이라도 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17:24~25)처럼 기독교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인간에게 다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 하나님 사역의 궁극적인 결론이 인간의 행복인데 어떤 인물, 어떤 자세, 어떤 태도, 어떤 방식을 전혀 샘플로, 견본으로, 모범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실체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6:5),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고, 어느 누구도 다를 수가 없기에 누가 하나님을 잘 섬겼다고 상을 주는 것이 없고, 누가 하나님을 모욕했다고 벌을 주는 것이 없고 대신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2. 그들과 같이 하지 말라
성경이 어떤 사람을 언급하는 경우의 하나는 어리석은 행동 즉 단순하게 미련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소중한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 또는 그와 관련해서 헛수고를 하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하나님이 복이나 은혜를 주셨는데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 유형에 대한 내용이 고전10장에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나왔고, 노예 신분도 벗어났고, 더 이상 노동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일단 그것만으로도 감사한데, 더 나아가 하나님이 가나안이라는 새로운 곳에 정착시켜 주시겠다고, 가나안에 가기 위해 광야를 지나야 하는데 하나님이 모든 식사를 책임져주신다고, 외부의 적들도 모두 막아주신다고, 밤낮으로 냉난방 시스템도 작동해 주신다고 하니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감사하면 되는 데 그것을 하지 못했습니다.
Ⅱ. 흔들리지 않는 나라
1. 에서와 같이 되지 않도록
기독교에서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등장하는 것은 오직 한 분 예수님뿐이고, 어떤 사람이 등장하면 모범 사례가 아니라 실패 사례이기에 반가워해야 할 것이 아니라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히12:16절의 에서에 관한 내용은 창25장에 나오는데 에서가 사냥에 다녀온데 ‘심히 피곤하여’, ‘내가 죽게 되었으니’라고 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성경은 에서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서 너무나 어이없이 팔아버렸다고 조롱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상시라면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요구하지 않았을 것이고, 에서가 팔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너무 절박하여 장자의 명분을 사고 팔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행동이 어리석은 것처럼 되어버렸다는 것이요 이것이 죄인의 전형적인 모습이고, 죄인의 한계라는 것입니다.
2.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
히12:24절은 아벨을 칭찬하는 것도 아니고, 비난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보자이신 예수의 십자가 사건, 보혈의 피를 강조하려고 상대적으로 아벨의 피가 비교 대상으로 언급되는 것뿐입니다. 아벨의 이야기는 창4장에 나오는데 어느 날 가인과 아벨이 각자 자기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렸고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는데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고, 마침내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아벨이 형을 속인 것도 아니고, 형이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막은 것도 아니고, 형의 물건을 훔쳐다가 제물로 바친 것도 아닙니다. 아벨이 죽임을 당할 일을 한 것이 없고 오직 가인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서 살해를 당했으니 정말로 억울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벨의 피로 말미암아 누가 치유를 받은 것도 없고, 누군가 위로를 받은 것도 없고, 어떤 사람이 수혈을 받아 살아난 것도 없고, 혹자가 감동을 받아 삶이 변화한 것도 없고,,, 억울하게 죽었다는 안타까운 소식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본문에서 예수의 피를 아벨의 피와 대조하는 것은 예수는 아벨보다 더 억울했다고 항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강조하려는 것은 예수가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아니라 죽임을 자처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강림하지 않았으면 죽음이 언급되지도 않는 것입니다. 기왕 강림을 했지만 귀신도 쫓아낼 능력이 있고, 이적과 기적을 행할 수도 있었기에 유대 관원들의 술책도 뻔히 알았고, 성전과 로마의 군병들을 물리칠 수도 있었고, 재판을 받을 때에 방어 논리를 펼 수도 있었고, 재판이 공정하지 않다고 여겼으면 바울처럼 황제에게 호소할 수도 있었는데 하지 않았으니 예수는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고, 미처 죽음을 피하지 못한 것이 아니고 아예 스스로 죽음의 길로 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 혼자만의 죽음이 아니고, 단순한 자살이나 타살의 죽음이 아니고,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역으로 죄를 물리치고, 죄인을 구원하는 엄청난 결과, 위대한 열매를 이루어 낸 것입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아벨이 소개되었고, 결론으로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라고 소개가 된 것입니다.
3. 진동하리라 vs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12:26절의 ‘진동하였거니와’는 출애굽하여 시내산에 도착한 사건을 설명하는 것인데(출19:18) 하나님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사역을 행하셨는데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우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더 큰 역사 즉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시키겠다는 예언이 학2:5절에 나왔고 본문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는 구약에서는 예언으로 미래에 대한 것, 장래에 대한 것이지만 히12장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일 즉 과거에 대한 것입니다. 진동하시는 이유는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이기에 핵심은 ‘진동하리라’가 아니라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들’ 또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입니다. 즉 예수가 십자가와 부활 사역을 통해 이룬 것, 12장의 표현대로 라면 22~24절의 ‘너희가 이른 곳’은 절대로 변하지 않고, 요동치지 않고, 휩쓸리지 않고, 취소되지 않고 28절처럼 ‘흔들리지 않는 나라’라는 것이요, 그것을 ‘너희가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역도 하고, 성취도 하고, 선물도 주고, 보장도 해 주고, 증명까지 해 주시는 것입니다.
4. 은혜를 누리자
하나님이 이렇게 모든 것을 해 주시니까 성도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은혜를 받자’ 즉 ‘은혜를 누리자’(히12:28)입니다. ‘누리자’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 사역을 통해 이루어 놓으신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12:29)인데 ‘은혜를 받자’라고 하면, 만약 은혜를 받지 못하면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를 못하게 되고, 그러면 소멸하는 불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소멸해 버리는 것으로 오해, 왜곡힐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순서대로 따라가 보면, 예수가 십자가와 부활 사역을 통해 죄의 권세를 이겼고, 그래서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고, 그러니 은혜를 누리자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누리는 것으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놀라움)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소멸하는 불이신 하나님이 이미 죄의 세력들을 소멸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항상 기쁘고 범사에 감사한 삶을 풍성히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