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 16 / 육체로 계실 때에 / 히브리서 5:7-10

by 캐리션 posted Oct 2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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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URL을 클릭하시면 유튜브 영상으로 설교시청이 가능합니다.

 

 https://youtu.be/e0HKmVq20nA

 

 

 

 

 

 

 

 

 

[히브리서 강해 16] ‘육체에 계실 때에

 

 

. 종교 개혁 주일

 

 

1. 기독교의 주체

종교 개혁이라는 표현이 기독교에는 적절하지 않은 이유는 인간이 기독교를 개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창시자는 당연히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예언을 따라 오셨고, 예수님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하려 사역하신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나, 하나님이 하신 사역 중에 그 어느 것도 바꾼 것이 없고, 그 어느 것도 개혁한 것이 없고, 하나님이 하지 않은 것을 예수님이 새로 시작하신 것이 없습니다. 기독교의 주체도 하나님이시고, 기독교의 내용도 오직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하나님이 사역하신 것들이 전부입니다. 하나님 말고 기독교에 관한 그 어떤 것도 만든 사람이 없고, 제안한 사람이 없고, 구성한 사람이 없고, 수정한 사람이 없고, 개혁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누구도 기독교의 내용을 추가할 수도 없고, 더 좋게 개선할 것도 없습니다.

 

 

2.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종교 개혁자들이 기독교와 관련하여, 복음과 관련하여 새로운 내용을 제안하거나 추가한 것이 없고 다만 이미 카톨릭이 하나님의 복음에서 멀리 떠나 있었기에 그것을 바로 잡으려고 한 것, 원래 하나님의 복음으로 돌아온 것뿐입니다. 첫째, ‘오직 성경을 주장한 이유는 카톨릭은 성경을 그냥 본문으로만 삼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진리가 이런 뜻이라고 설명한 사제들의 풀이, 카톨릭 교회의 풀이가 진리라고 주장했기에 자기들이 진리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진리를 결정하니까 진리 위에 있었던 것입니다. 개혁가들은 인간의 해석이나 전통이 아니라 오직 성경만이 진리이고 모두가 더 정확한 이해를 위해 노력하자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오직 성경이 엉뚱하게 왜곡되어 성경에 있으면 된다가 되어버렸습니다.

둘째 오직 믿음을 주장한 이유는 카톨릭이 하나님이 결코 만드신 적이 없는 수단과 방법을 만들어 냈기 때문입니다. ‘성사’, 성스러운 종교 행위라고 것으로, 이것이 너무 신령한 것으로 특별한 효력을 가진 종교 행위이기에 이 성사에 참여 여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가들은 인간이 만들어 내고, 인간이 집행하는 종교 행위가 특별한 효력을 발생한다는 주장은 어처구니가 없다고 지적하면서 그런 것은 필요없고 오직 믿음하나로 충분하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오직 믿음이 왜곡되어 인간이 믿어야 한다는 새로운 수단이나 방법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의미인데 카톨릭은 교회가 하는 종교 행위가 중요하다고 변질시키고, 개신교는 개인이 믿는 행위가 중요하다고 변질시킨 것입니다.

 

 

3. 오직 은혜

셋째, ‘오직 은혜를 주장한 이유는 카톨릭이 인간의 공덕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변치않는, 일관된, 신실한 사역원리가 바로 오직 은혜인 것은 죄인이 애초에 하나님을 모르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기준이나 자격요건을 갖출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신앙을 제외한 모든 종교가, 유대교에서는 의로움’. 카톨릭에서는 공덕이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조건을 제시하고 요구했습니다. 인간이 이런저런 종교적 행위나 활동을 통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행동을 하고, 그것이 쌓이면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인간이 죄인이라고 선포하는 것과 완벽하게 배치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실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가들이 인간은 공덕을 쌓을 수도 없고, 누군가의 공덕을 나누어 가질 수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오직 은혜가 아니라 은혜받기 전에는 은혜받을 만한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수고하고, 애쓰고 헌신할 것을 요구하고, 은혜받은 다음에는 받은 은혜를 잊는 것은 배은망덕이다.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며 충성하고 희생할 것을 요구합니다.

 

 

4. 종교 개혁

개혁가들이 강조한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는 공통적으로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한다는 자격이나 조건을 거부한 것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먼저 존재를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예수를 아들로, 그리스도로 강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이기에, 그리스도이기에 아들다운 삶, 그리스도다운 사역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도 하나님이 먼저 새로운 피조물, 성도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는 성도다라고 선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성도는 성도답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혹시 성도다운 모습이 부족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심하게는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죄인만도 못하게 살아갈 수도 있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더 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성도답도록 지속적으로 도우시는 것입니다.

 

 

. 육체에 계실 때에

 

 

1. 육체에 계실 때에

1장에서 강조하는 대로 예수님은 아들이시고, 2장에서 강조하는 대로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신 존귀함을 가지신 분입니다. 이런 분이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2:14),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5:7)가 기독교의 거룩함, 하나님의 거룩함, 아들의 거룩함, 즉 세상과 다른 점입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상대를 누르고 올라서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은 자녀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든 권세를 놓고 자녀들과 같은 모양을 함께 지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하나님의 존귀나 영광에 집착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어떻게든 인간들에게 찬양을 받고 싶어하는 분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죄인이라도 극진하게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이기에 책임을 지시려고 하나님이, 아들이신 예수님이 자녀들과 같이 되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존심은 하나님의 명예와 존귀와 권세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책임을 다하는 것, 하나님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에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신 후에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2:11),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2:17)와 같이 우리 하나님은 저 높은 하늘에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2. 예수의 삶, 사역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우셨고, 죽은 나사로의 집에 가서 우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치신 것은 십자가 사역을 너무 힘들어 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절규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역을 하러 오신 분이기에 죽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지 않고 있으니까 하나님께 나를 버리시냐고 호소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 때문에 힘들어 하신 적이 없고 망설이신 적이 없고 주저하신 적이 없고 피하신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이 사역 때문에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육체로 계실 때에’, 어느 한 순간이나 어느 한 사건이 아니라 공생에 전체에 죄인들이 죄에 사로잡혀 있는 것에 대해서나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육체로 계실 때에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께 죄인들을 구원해 달라고, 예언된 사역을 꼭 행하고 성취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셨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간구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하나님이 흔쾌히 들어주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