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URL을 클릭하시면 유튜브 영상으로 설교시청이 가능합니다.
https://youtu.be/FVDcmhPcad8
[히브리서 강해 37]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
Ⅰ. 하나님의 복음
1. 유일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요 지금도 천지를 섭리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과 경쟁하는 신이 존재하지 않으며 당연히 하나님이 누구와 경쟁하지 않으십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 ‘내가 가장 크다, 내가 가장 높다, 내가 가장 세다’고 과시한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누구를 이겼다, 누구를 물리쳤다, 누구에게 항복을 받았다고 자랑한 적도 없습니다. 성경에 우상이 등장하는데 그 우상들은 죄인들이 신으로 생각하고 섬기는 존재일 뿐 실제 신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우상들에 대하여 ‘그것들은 헛것이다’라고 알려 주십니다. 출애굽을 할 때에 하나님이 10가지 이적을 행하신 것에 대해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출12:12), ‘여호와께서 그들의 신들에게도 벌을 주셨더라’(민33:4)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애굽의 신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하나님과 맞짱을 뜨지도 않았고,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애굽 사람들에 의해 신으로 섬김을 받고 있지만 실상은 아무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상들은 헛것일 뿐이고, 다만 죄인들이 어리석게도 신으로 섬기고 있었을 뿐입니다.
2. 하나님을 위하여
사람들은, 죄인들은, 이방인들은 신들끼리 싸움을 붙이고 패한 신의 신상을 자기들이 섬기는 신의 신전으로 끌고 갔습니다. 패한 신에게 굴욕을 당하게 하고 승자의 기분을 만끽하는 행동을 애굽과 바벨론이 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이긴 적이 없습니다. 우상과 싸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상들을 끌고 온 적이 없고, 우상들을 무릎 꿇린 적이 없고, 우상들 위에 군림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와도, 무엇과도 경쟁하지 않으시기에 누구를 이기려고 애를 쓰신 적도 없고, 이런 허무한 일에 인간을 동원하고, 인간을 앞세우고, 인간을 희생시킨 적이 정말로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때문에 너무 힘들고, 하나님을 섬기느라 고달프고, 하나님께 드리고 바치느라 삶이 버겁다’고 불평하거나 하소연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도 평생토록 하나님의 사명에 집착한 사람이 없고, 하나님 때문에 평화롭던 가정이 깨어진 적이 없고,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포기한 경우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우상들과도 완전히 다른 거룩한 분이시기에, 기독교가 세상의 어떤 종교들과도 완전히 다른 거룩한 종교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내용도, 기독교의 방식도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과업을 명령하지 않았고,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어떠한 종교적 행위나 활동을 요구하지 않았고,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라고 종교적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3. 서로 다른 생각들
기독교의 내용, 기독교의 복음, 기독교의 원리, 기독교의 방식을 세상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전달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마음과 기준과 개념을 선포하고 세상 즉 죄인들은 죄의 마음과 기준과 개념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과 사람들, 예수님과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하는데 전혀 어울리지 않는, 초점이 맞지 않는, 엉뚱한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요3장에서 예수님과 니고데모가 대화하는데 예수님이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니고데모가 최대로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이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 나는 것’입니다. 요4장에 예수님이 사마리아 지역의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다 와서 음식을 드리며 ‘랍비여 잡수소서’하고, 예수님이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고 하니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합니다. 대화는 ‘음식, 양식’이라는 공통적 주제로 진행되는데 서로 말하는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양식의 내용을 상상이나 했었을까요? 요7장에서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시니까 사람들의 반응이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이고 예수님의 대답이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입니다. 사람들은 예수가 ‘글’을 아는 것을 의아해 할뿐이요 예수님은 ‘교훈’ 즉 예수가 가르치는 내용, 예수의 사상, 예수의 개념, 가치, 의미, 원리, 방식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식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죄인은 죄적 인식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의 내용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인을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알아들을 수 있는 존재로, 즉 죄인을 성도로 하나님이 변화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성도가 복음을 이해할 수 있고, 복음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Ⅱ. 온전하게 된 의인들
1. 너희가 이른 곳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노예에서, 노동에서 해방되어 시내산에 도착하였기에 더 나아가 가나안에 입성하였기에 상황적으로나, 조건적으로나, 처지로나 상태로나 인간이 응답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변화를 받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는 ‘이른 것이 아니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이른 곳’은 이 모든 것보다 훨씬 더 좋은 내용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입니다. 8가지가 나왔고, 표현적으로는 천차만별이지만 내용은 동일한 것이요 성도는 이미 이르렀고, 정상적으로 도착을 했고, 더 나아가 그곳에 머물러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8가지 중 어느 하나에만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동을 심판하여 어울리는 한 곳으로 옮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8가지에 모두 이르기는 하는데 차례대로 또는 순서대로 또는 단계별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이미 8가지 모두에 이른 것입니다.
2. 문예적 풍경
성경은 내용적으로 진리인 것은 당연하고, 그 표현에 있어서 매우 문학적입니다. 즉 동일한 내용을 누구를 중심으로 소개하느냐에 따라 표현이 아주 달라집니다. 천국,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면 우리를 데리고 간다고 합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배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는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입니다. 하나님이 기준이니까 하나님은 그곳에 머물러 계시고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인간을 기준으로 하면 정반대가 되어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입니다. 이번에는 천국이 저기 있고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여기 있고 천국이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내용이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각 상황에서 강조하기 위해 기준을 달리해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내용적으로 너무 귀하고 표현적으로 매우 아름답습니다.
3.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
‘너희가 이른 곳’에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여기에 가려고 노력하거나 애를 쓰거나 수고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미 이루어졌고, 성취되었고, 완성된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결과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너희가 이른 곳’은 어떤 상황이나 조건이나 처지나 상태에 대해서는 단 하나도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일하신 하나님과 예수님이 강조되고,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역으로 이루어진 성도의 모습이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른 곳’은 예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죄가 소멸된 곳이고, 성도는 하나님의 마음과 기준과 원리와 가치와 개념과 방식과 능력으로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