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URL을 클릭하시면 유튜브 영상으로 설교시청이 가능합니다. https://youtu.be/K8K2XRdxDgw
[주일 설교] ‘하나님이, 우리가’
Ⅰ. 구원하는 종교
1. 여호와 신앙
기독교(개신교)가 종교개혁을 통해 세워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개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야 하는 단체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주체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중에 어느 누구도 기독교의 내용에 공헌한 경우가 없고, 기독교의 원리나 방식에 의견을 제시한 적이 없고, 기독교의 능력에 힘을 보탠 사람이 없습니다. 태초로 지금까지 하나님이 여호와 신앙의 모든 것을 세우시고 운영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단 한 번도 여호와 신앙의 내용을 개정하신 적이 없고, 기준과 개념과 가치를 수정하신 적이 없고, 원리와 방식을 변경하신 적이 없고, 그 어떤 것도 추가, 보완, 교체하신 적이 없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여호와 신앙을 새롭게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했을 때 하나님이 사사들을 12명이나 세웠지만 단 한 명도 새로운 내용, 새로운 방식을 시도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성전이 있는 남 왕국에, 성전이 없는 북 왕국에, 나라가 패망하기 전에, 패망한 후에 즉 이스라엘이 다양한 상황, 다양한 처지, 다양한 조건으로 변화가 있었을 때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나라의 상황이 달라지고 백성의 상황이 달라지면 신앙의 내용이 조금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고, 종교의 양상이나 방식이 조금 변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 시대에, 여러 나라에,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셨지만 단 한 번도 여호와 신앙의 내용을 바꾸신 적이 없고, 여호와 종교의 양식을 변경하신 적이 없습니다. 여호와 신앙이 보수적이라거나, 전통적이라거나 고리타분하다거나, 하나님이 인간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 여호와의 신앙이 진리요 어떤 시대나 상황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라는 것입니다.
2. 달라진 종교
남왕국의 13대 히스기야 왕과 16대 요시야 왕 때에 여호와의 성전을 정화하고 유월절을 지켰다는 것을 종교 개혁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히스기야나 요시야가 주도적으로 종교를 새롭게 한 것이 아니고, 더 나아지게 개선한 것이 아니고, 백성들에게 더 유용하도록 수정하거나 보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신앙에 대해서는 종교가 개혁되었다고 말하기 전에 이미 종교가 왜곡되었고, 변질되어 있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하나님이 원래 제정하신 내용과 목적과 의도와 방식과 다르게 바꾸었는데 전혀 좋아진 것이 아니고, 유익해진 것이 아니고, 효과적인 것이 아니고 도리어 악화시키고 망가뜨리고 해를 끼쳤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여호와를 버리고 잊고 떠납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의 생각에, 기준에, 방식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아예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에 드는 우상, 자기들 기준에 맞는 이방 종교, 자기들 방식에 합당하게 생각되는 죄의 종교를 제 발로 선택한 것입니다. 우상 종교, 이방 종교를 통해서도 유익을 얻지 못하자 여호와 신앙을 바꾸어버렸습니다. 자기들의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필요에 따라서 이런 저런 것을 수정하고 변경하고 보완하고 첨부하였습니다. 이들이 놓친 것은 기독교의 주체, 기독교에서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바꾸시지 않는 한 인간이 수정하고, 변경하고, 보완하고, 첨가하는 모든 것은 무조건 왜곡이고, 무조건 변질입니다. 여호와 신앙은 인간에게 하나님을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3. 달라진 사람
하나님은 종교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주목하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최상, 최고의 인간이 달라져서, 변화되어서 악화되었고 불행해진 것을 타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쁘게 변화된 인간을 되돌리는 것을 세상에서는 ‘회복’이라고 하고 기독교에서는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신앙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신앙, 가장 쉽고 편하고 자연스럽고 단순하고 좋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인간이 여호와 신앙에 손을 댈 일이 없고 더 이상 좋게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혹시라도 바꾸고 변경하고 수정하면 그것이 신앙의 타락, 종교의 변질이요 왜곡입니다. 인간에게 불편해 지고, 어려워지고, 복잡해지고. 힘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종교를 개혁하거나 발전시켜가는 패턴이 전혀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이 인간을 회복시켜주시는 패턴입니다.
Ⅱ. 하나님이, 우리가
1. 침례 요한의 선포
복음서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유대교라는 종교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종교, 여호와의 율법을 준행한다고 하는 종교인데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리 벗어났습니다.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지 않은 종교적 제도가 둥지를 틀었고, 죄의 종교들에서 사용하는 온갖 종교 제도가 시행되었고, 하나님과 무관한 종교 행위들이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부르시고 세우시고 보내신 사람, 침례 요한이 등장하는데 유대교에서 등장한 개혁세력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낸 혁신적 인물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광야의 소리입니다. 요한이 선포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는 매우 어색하고 불편한 내용이었고,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는 다소 희망적이었습니다.
2.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요한이 유대교가 가르치는 내용과는 다른 말을 하니까 유대교가 요구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를 질문합니다. 죄인들의 전형적인 내용으로, 모든 종교가 요구하는 것이 있고 인간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대답을 듣고는 어안이 벙벙했을 것입니다. 이런 요구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기대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인데, 유대교에 의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 것인데, 침례 요한이 유대교와 어느 정도 비슷한 것을 말해야 납득이 되는데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된 것, 하나님에 의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 그래야 하나님의 복을 받을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러면 최소한 종교적인 행위, 종교 활동에 관한 내용이 제시되어야 할 것인데 제사가 아니고, 기도가 아니고, 헌금이 아니고, 율법이 아니기에 매우 당황스러운 것입니다.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가 하나님과 상관이 있습니까? 이렇게 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습니까? 아마 이 사람들은 포기 했을 것입니다.
3. 하나님이
나아온 사람들은 침례 요한이 선포한 말에 대해 심각하게 오해한 것입니다. 첫째, 침례 요한은 사람들이 행한 일을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이렇게 행해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고 수단과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침례 요한에게 나온 무리들, 세리들, 군인들은 공통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를 물었습니다. 왜요? 당시 유대교가 늘 ‘너희가 ~~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 ~~을 하려고 명령하셨다, ~~을 해야만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유대교뿐만 아니라 당시의 이런 저런 사이비 종교도 똑같은 말을 했고, 로마의 교육도 똑같은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침례 요한이 선포한 내용의 핵심은 ‘하나님이 하시리라’입니다. 요한이 종교 개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리라!’를 알아들었다면 무리들, 세리들, 군인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신답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신답니까? 하나님이 언제 하신답니까?’라고 전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질문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보다 더 직접적으로 ‘내가 너희를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기독교의 선포, 성경의 선포의 핵심은 ‘하나님이 하신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