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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강해 8] ‘놓아 주려 하심이니’
Ⅰ. 합당하도다
1. 광야 생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에 들어가 40년을 지냅니다. 광야 생활에 대해 ‘하나님이 훈련하신다, 하나님이 연단하신다, 하나님이 시험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해입니다. 비록 애굽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서는 고된 훈련, 하나님의 자녀다워지기 위한 어려운 수련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 오해이고, 오늘날의 신앙생활에서도 시련과 역경이 발생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더욱 강건하게 하려고 우리를 훈련시키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고, 더 성숙하려면 더 큰 훈련을 받을 것이고,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이 오해입니다. 광야에 들어온 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힘들게 했습니까? 무슨 훈련을 하고, 무슨 연단을 하고, 무슨 시험을 하고, 어떤 고난, 어떤 역경, 어떤 시련을 주었습니까? 광야가 평야에 비해 여러 가지가 부족할 수 있고 조금 불편할 수 있지만 그런 상황들을 하나님이 다 해결을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을 가지고 위협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생명에 관한 것으로 인간을 시험하는 치졸한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훈련, 연단, 시험 등의 명분으로 인간의 가장 소중한 인권을 침해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의식주를 완벽하게 제공하셨고, 이방의 공격이 있을 때에도 하나님이 싸우셔서 백성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이 40년 동안 백성들의 시험하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40년 동안 시험을 받으신 것, 하나님이 자원하여 백성들의 점검을 받으신 것입니다. 혹시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안과 두려움가운데 불편한 생활을 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광야를 아주 어려운 훈련코스로 만들어 놨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무지했기 때문일 뿐입니다.
2. 합당하도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리가 죄인들의 사고방식과 완전히 다릅니다.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으나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를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2:8),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2:9),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2:10)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실수하신 것이 아니고, 권세자로 등극하지 못한 것이 아니고 지극히 의도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합당하게 행하신 결과가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 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2:11)입니다.
Ⅱ. 놓아주려 하심이니
1. 같은 모양으로, 같이 되심
기독교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인데 사실은 기독교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오해, 하나님에 대한 가장 심각한 오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본질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우상들과 다르다고 강조하신 것, 하나님이 우상과 차별화를 두신 것,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선포하신 내용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위에 군림하지 않는 것, 인간을 하나님 아래에 낮아지게 하지 않는 것,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상명하복이 되지 않게 하는 것, 인간이 하나님 때문에 또는 하나님을 위하여 희생하게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이고, 인격적인 분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이십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하나님이심이 확인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에 의해서, 어떤 것에 의해서 하나님이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의 맨 처음에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는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오고, 하나님이 무엇이든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인간이 존귀해 지는 것, 하나님으로 인해 인간이 풍성해 지는 것, 하나님으로 인해 인간이 자유와 안식과 행복을 누리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시작이요,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가 아니고, 도리어 인간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같은 모양으로, 같이 되어 주시기까지 하시는 것입니다.
2.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설명하는 것으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예수께서 죄의 형벌인 죽음을 대신 당해주었다는 ‘대속설’, 예수께서 죽음의 세력을 가진 마귀를 멸하시고 승리하셨다는 ‘승리설’,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대가를 치르셨다는 ‘공의설’, 인간이 서로를 존중하며 사랑하며 살라고 직접 본을 보여주셨다는 ‘모범설’이 있습니다. 공통점은 ‘하나님이 하셨다’, 또는 ‘예수님이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일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엄밀하게 표현하면 인간이 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일하셔서, 하나님이 이미 결과를 완성해 놓으셨습니다. 인간이 추가할 일, 인간이 보완한 일, 인간이 새롭게 할 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수고를 통해, 인간의 희생을 통해 기독교의 내용이 더 나아질 것이 없습니다. 성도가 누려야할 구원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에 대해 히2:14절은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고,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사랑의 교제,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 관계는 법이나 규정으로 유지되는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시, 명령한 것이 없고, 혹시 불법을 행하면 심판하여 징계나 형벌을 내리겠다고 엄포를 내린 적도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버렸고, 그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대신 인간은 사단에게 사로잡혀 죄의 종, 죄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은 죄 또는 사단의 지배를 받았고, 죄를 따라 행동했고, 죄의 결과를 당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3.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인간의 행복을 망친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입니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입니다. 인간이 두려워하고 벗어나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입니다. 인간이 불안하고 염려하며 살게 된 원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 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것 하라, 이것은 하지 말라’는 명령을 담은 법을 주셨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에게 명령할 수 있는 권세가 있고, 인간은 피조물로서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어겨서 하나님이 심판하여 죽음이라는 형벌을 내리셨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회개하여 사죄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발 기독교를 세상의 종교의 패턴으로 왜곡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발 하나님이 세상의 우상 신들과 같은 원리로 행동하시는 것처럼 왜곡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모든 원인은 전적으로 죄, 사단입니다. 인간은 사단에게 당하여 죄인이 되었고, 죄인으로서, 사단의 종으로서 사단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며 살았는데 그 결과는 죄의 종노릇이었고, 죄의 결과를 당하는 불행한 삶이었습니다. 인간이 치를 떨어야 하는 대상이 죄이고, 인간이 경멸해야 할 대상도 사단이고, 인간이 온갖 비난과 저주를 퍼부어야 할 대상이 사단입니다.
15절에 ‘모든 자들이 한 평생 매여있다’고 하는데 사단에게 매여있고, ‘한 평생 매여 종 노릇했다’고 하는데 사단의 종노릇을 하였고,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라고 하는데 사단으로부터 놓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알지 못하고 할 수 없는 것,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구원받은 성도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구원을 알아 하나님의 은혜와 복락을 풍성히 누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