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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12] ‘돕는 배필’
Ⅰ.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1. 경배의 대상?
‘기독교의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라는 표현이 사람들에게는 어색하고 불편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은 늘 경배 또는 숭배 또는 예배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은 늘 높은 분, 강한 분, 센 분으로 당연히 지시하고 명령하고, 감시하고 통제하고, 상이나 벌로써 인간을 다스리고 지배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하나님은 아예 인간이 되시고, 인간의 삶에 임재하고 동행하시며 인간을 위해 친히 수고하고 열심을 다해 일하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은 일하는 자를 경배, 숭배, 예배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을 소개할 때 가능한 멋있게, 우아하게, 폼나게, 세게 소개하고 싶어해서 늘 사용하는 표현이 ‘전지전능, 영원무궁, 무소부재, 만군의 여호와,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삼라만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정작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의 아버지는 포도원 농부라’고 소개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목자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하나님이 포도원 농부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자체의 존귀와 위엄을 강조하지 않고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일하시는 내용, 그 결과 인간에게 주어지는 유익, 혜택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 또는 ‘신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고대 시대에나 로마 시대에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고대에서 왕들, 임금들, 황제들은 ‘신의 아들’이라고 인정되었고, 더 나아가 ‘신’이라고 추앙받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에서도 황제는 ‘신의 아들’ 즉 신급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어떤 인간을 황제로 섬기는 정도가 아니라 황제를 숭배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사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 사람들이 도무지 인정할 수가 없었고, 납득할 수가 없고, 수용할 수가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 예수가 자신을 ‘신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했고, 후일에 제자들과 사도들이 예수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 ‘주’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 일로 예수를 잡아 죽이고, 예수를 ‘신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기독교를 탄압까지 했던 이유는 예수가 목수로서 일하는 자였고, 십자가에 처형을 당할 정도로 낮고 천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혹시 황제가 불량한 사람일지라도, 부정하고 부패한 권력자일지라도, 심지어는 미친 사람일지라도 황제에게는 ‘신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붙일 수 있었지만 아무리 선하고 성실하고 의로운 사람일지라도 일하는 자, 낮은 자, 천한 자에게는 ‘신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붙일 수 없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만큼 신은 높은 자였고, 당연히 경배, 숭배, 예배의 대상이었습니다.
3. 순종의 대상!
신, 하나님을 경배, 예배하는 것에 집중하면 하나님의 뜻과 원리와 목적과 마음과 기준에 대해서 배우지 않고 대신 신을 향한 인간의 행위에 집중합니다. 무릎을 꿇고, 엎드리고, 절을 하고 신이 높은 만큼 인간이 낮아지는 것이고, 인간이 낮아지는 만큼 신이 경배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죄의 종교, 우상 종교, 이방 종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배하라, 숭배하라, 예배하라’고 강조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따르라’,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라’,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합니다. 강조가 경배, 숭배, 예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 본받음, 따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복음을 들어야 하고 배워야 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너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좋으냐, 네가 받은 복이 얼마나 유익하냐!’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하니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니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발 ‘하나님을 높이자’라고 외치지 말고 ‘하나님을 따르자’라고 하시기를 바랍니다. 제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라고 말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자’라고 하시기를 바랍니다.
4.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요소가 ‘의, 식, 주’ 즉 입는 것, 먹는 것, 거하는 것인데 창1, 2장에는 따로 입는 것에 대해 언급이 없고, 거주하는 것에 대해서도 별도의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먹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거리가 되리라’입니다. 핵심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친히 먹을 거리를 제공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위해서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강조되어야지 채소가 강조되거나 나무가 강조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누리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Ⅱ. 돕는 배필
1. 좋지 아니하니
창1장에는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일곱 번 나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하나님이 뜻하시고 기대하신 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창조된 모든 피조물들이 잘 생활하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가고 있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흐믓하다는 의미이고, 인간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창2장에서 처음으로 ‘좋지 아니하니’가 등장합니다(창2:18). ‘좋지 아니하니’라고 해서 하나님이 창조를 잘못하셨다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이 좋지 아니한 것을 만드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인간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아직 미완성되었기에 ‘보시기에 좋지 아니하니’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를 계속하시어 드디어 완성을 하실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혼자 사는 것’은 싱글이나 독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고 해서 인간은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고독하다, 외롭다, 분리하다’와 같이 사회적 관계가 없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존재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으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존중하고 서로 화목하고 함께 평안하고 함께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함께 살라고, 더불어 살라고, 어울려 살라고 ‘돕는 배필’을 주신 것입니다. ‘돕는’은 ‘도와주다’는 뜻만 아니라 ‘더하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배필’은 ‘~ 앞에, 상대편에, 맞은 편에’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맞은 편에서 서로를 도와주는 자’, ‘앞에서 서로를 더 풍성하게 하는 자’입니다.
2. 돕는 배필
창2:18절 끝에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가 나오고 19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지으시고 아담에게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는 아담에게 ‘너와 함께 인생을 즐기며, 너와 더불어 행복을 누리며, 너를 기쁘고 신나고 풍성하게 해 줄 수 있는 동반자’를 선택해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담이 각종 들 짐승과 각종 새들의 특징들을 자세히 살펴보았고, 그것들의 특징, 장점들을 잘 파악했고, 그에 알맞게 이름을 정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그것들 중의 단 하나도 자기 인생의 조력자나 동반자로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 중에는 아담을 돕는 배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자를 창조하시고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2:23)입니다. 이는 드디어 아담에게, 인간에게 동반자가 생긴 것이요, 인간이 창조된 후에 최초로 한 말이 바로 자기의 동반자에 대해서 감탄하면서 선언한 말입니다. 인간은 상대방을, 맞은 편에 있는 사람을,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내 삶의 조력자, 내 인생의 동반자로 여기면서 함께 어울려 하나님의 복락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기대하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남편과 아내와 부모와 자녀와 친척과 동료와 하루하루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행복을 누리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