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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와 각종 성경공부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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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 욥 기 22 ~ 31

 

. 엘리바스와 욥의 세 번째 대화 (22~24)

 

1. 네가 의로운 들

친구들과 욥의 대화는 평행선 일 수 밖에 없습니다. 무조건 인과론으로 몰아세우는 친구들과 자신의 삶을 아는 욥의 현실론이 대립합니다. 친구들은 전통과 경험에 근거한 지혜를 동원하였고 욥은 친구들에게보다는 차라리 신에게 호소하였습니다. 대화를 거부당한 친구들로서는 화가 나고 자신의 지혜가 정당함을 주장하기 위해 욥을 더욱 몰아세우게 됩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자기에게 유익할 따름이니라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22:2~3)입니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욥의 주장을 차단하려는 의도일 뿐입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욥의 악을 지적하는 것이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한 때문이냐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까닭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그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갑자기 너를 엄습하며 어둠이 너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홍수가 너를 덥느니라”(22:4~11)입니다. 욥이 신에게 호소함에 대해서 비난합니다(22:12~20).

 

2.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엘리바스가 제안은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22:21~26)입니다. 전형적인 진인사 대천명의 방식입니다. 훌륭한 말이지만 가능성이 없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에게 하신 말씀, 하나님이 죄인을 대하시는 방식과 완전히 다릅니다.

 

 

3. 순금같이 나오리라

욥은 답답하여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23:2)고 합니다. 직접 하나님을 뵙고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23:3~7)입니다. 엘리바스의 하나님()은 징계하는 심판자요 욥이 만나고 싶은 분별하는 중재자입니다. 욥이 밝혀달라는 내용은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하 여겼도다”(23:10~12)입니다.

 

4. 어떤 사람은, 어떤 사람은

친구들의 인과론에 대항하여 욥은 악인의 형통에 대해 반문했었습니다(21:7~16). 동일한 주제의 반복이 24장입니다. “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놓지 아니하셨는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 어떤 사람은 땅의 경계표를 옮기며 양 떼를 빼앗아 기르며 고아의 나귀를 몰아 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 가난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나니 세상에서 학대받는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24:1~4), 반면에 가난한 자들은 그들은 거친 광야의 들나귀 같아서 나가서 일하며 먹을 것을 부지런히 구하니 빈 들이 그들의 자식을 위하여 그에게 음식을 내는 구나 밭에서 남의 꼴을 베며 악인이 남겨 둔 포도를 따며 의복이 없어 벗은 몸으로 밤을 지내며 추워도 덮을 것이 없으며 산중에서 만난 소나기에 젖으며 가릴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24:5~8)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머니의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으므로,,,”(24:9~12), “또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죽이는 자는, 가음하는 자의 눈은, 어둠을 틈타 집을 뚫는 자는,,,,” 즉 악인이 여전히 형통합니다. 과연 인과론이 맞습니까? 욥은 친구들이 했던 주장을 패러디해서 제발 신이 악인들을 심판해 달라고 합니다(24:18~27). 일종의 조롱입니다.

 

 

. 빌닷과 욥의 세 번째 대화 (25~26)

 

 

1.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

빌닷은 전형적인 이방적 신개념을 반복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그의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가 비추는 광명을 받지 않은 자가 누구냐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25:2~6)입니다. 이방의 신은 과연 강하고 셉니다. 다만 신의 주권과 위엄이 오직 신의 권위를 보전하기 위하여, 죄인을 심판하기 위하여 쓰인다는 것입니다. 신에게 은총과 자비가 없습니다. 인간에게 무익한 신입니다.

 

2. 과연 대단하도다

빌닷의 주장을 조롱하며 네가 힘 없는 자를 참 잘도 도와 주는구나 기력 없는 팔을 참 잘도 구원하여 주는구나 지혜없는 자를 참 잘도 가르치는구나 큰 지식을 참 잘도 자랑하는구나 네가 누구를 향하여 말하느냐 누구의 정신이 네게서 나왔느냐”(26:1~4)고 합니다. 이어서 빌닷처럼 신의 주권과 위엄을 한껏 높입니다. “죽은 자의 영들이 물 밑에서 떨며 물에서 사는 것들도 그러하도다 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 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그의 입김으로 하늘을 맑게 하시고 손으로 날렵한 뱀을 무찌르시나니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26:5~14)입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즉 아무리 신이 위대할지라도 인간이 신을 알지 못하고, 신의 은총을 받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반박하는 것입니다.

 

 

. 욥이 풍자하여 이르되 (27~28)

 

 

1.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구약이 인간이 하나님의 속성, 성품을 바르게 고백, 선포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건과 말씀으로 계시하면 그것을 반복하거나 반응하는 것이 최대치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보다는 라합, 나아만, 느브갓네살 등 이방인이 행하는 것이 역설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인과론의 신 개념, 심판을 위한 공의의 신을 주장하였고, 경험과 전통과 연륜에 근거한 지혜를 주장하였기에 욥이 아주 신랄하게 비꼬아 줍니다. 도무지 인정할 수 없다는 저항입니다.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27:2)의 하나님()은 친구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입니다. 욥은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는 억울함을 호소하고(27:4~6), 신에 대하여는 비난합니다. 욥이 주장하는 신(27:7~12)은 악인을 심판하여 진노하는 분으로 친구들이 주장하는 신과 같습니다. 친구들은 공의의 신을 주장하는 것이고, 욥은 공의의 신이라면 제발 공의롭게 행동하라고 추궁합니다. 더 나아가 친구들의 주장과 똑같은 악인에 대한 징벌’(27:13~23)을 반복합니다.

 

2. 지혜는 어디서, 명철은 어디서

친구들이 지혜자로 자처했기에 욥이 무익한 지혜, 어리석은 지혜, 아픈 자를 더 아프게 하는 지혜를 조롱합니다. “은이 나는 곳이 있고 금을 제련하는 곳이 있으며 철은 흙에서 캐내고 동은 돌에서 녹여 얻느니라”(28:1~2)이고 이를 위하여 인간이 참으로 수고를 합니다(28:4~11). 그렇게 수고하여 필요한 것을 얻으면서 정작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고 그 길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는 찾을 수 없구나”(28:12~13)라고 조롱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비싼 값을 주어도 도무지 구할 수 없으매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이 머무는 곳은 어디인고”(28:20), 아무도 모릅니다(28:21~22). 지혜롭다하는 자들을 모두 비웃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참다운 지혜를 소개하는 것이 하나님이 그 길을 아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28:23~28)입니다.

 

 

. 욥이 풍자하여 이르되 (29~31)

 

1. 나를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욥의 유일한 소망이 고백됩니다. “나는 지난 세월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하노라 그 때에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치었고 내가 그의 빛을 힘입어 암흑에서도 걸어다녔느니라”(29:2~4)에는 하나님의 일하심, 하나님의 사역이 있습니다. 친구들의 신은 공의만 주장하며 심판을 행했지만 욥의 하나님은 욥을 보호하고 등불을 비추어 주신 분입니다. 욥은 하나님 안에서의 자신의 행적(29:5~25)에 대해 담대하게 고백합니다.

 

2. 이제는, 이제는

욥은 그때에는’(29:3, 5)과 대조하여 이제는’(30:1, 9, 16)으로 탄식합니다. “이제는 나보다 젊은자들이 나를 비웃는구나 그들의 아비들은 내가 보기에 내 양떼를 지키는 개 중에도 둘 만하지 못한 자들이니라”(30:1~8)는 아주 통렬한 비난이고, “이제는 그들이 나를 노래로 조롱하며 내가 그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으며 그들이 나를 미워하며 멀리 하고 서슴지 않고 내 얼굴에 침을 뱉도도다”(30:9~15)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참담함의 토로이고, “이제는 내 생명이 내 속에서 녹으니 환난 날이 나를 사로잡음이라”(30:16~17)는 곤고함의 탄식입니다. ‘하나님(욥의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와 대조하여 하나님(친구들의 신)이 징계받은 때’(30:18~23)를 언급하며 신을 원망합니다. 대신 하나님께 연약함을 호소합니다(30:24~31:4).

 

3. 만일, 만일, 만일,,,

욥은 친구들의 정죄에 절대 동의할 수 없었고 당연히 인과론에 근거한 형벌이라는 주장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앞에서는 악인의 형통’(21, 24)으로, 이번에는 욥의 행적’(31)으로 반박합니다. “만일 내가 허위와 함께 동행하고 내 발이 속임수에 빨랐다면”(31:5~8), “만일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문에서 숨어 기다렸다면”(31:9~12), “만일 남종이나 여종이 나와 더불어 쟁론할 때에 내가 그의 권리를 저버렸다면”(31:13~19), “만일 내가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어가는 것이나 가난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못 본 체 했다면”(31:19~23), “만일”(31:24, 25, 26, 38, 39)실상은”(31:30, 32)이 대조합니다. 친구들의 주장과 욥의 반론을 모두 들었습니다. 욥기는 욥의 신실함을 강조하기 보다는 친구들의 입을 통해 죄인들의 사고방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죄인들의 신과 다른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셨고, 계시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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