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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와 각종 성경공부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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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강 민수기 15 ~ 19

. 인자하신 하나님 (15)

 

1. 죄인의 모습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40년 중에 처음 일 년과 나중 일 년을 제외하고는 시간적 흐름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처음 일 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시내산으로 인도한 것과 성막 등의 준비를 한 내용이고, 나중 일 년은 가나안 입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다시 한번 하나님의 사역과 계시를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즉 광야 생활 앞뒤에 하나님의 사역이 소개되고 있고, 이스라엘의 행동은 시간과 관계없이 여러 사건이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죄된 행동은 시간, 장소, 상황에 따라 변화된 것이 아니라 처음이나 나중이나 동일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출발하자마자 하나님께 온갖 불평을 토로했습니다. 하나님의 준비는 철저하고 충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받은 바 축복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의 탐지를 통하여 더욱 분명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시키려 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도리어 시험에 들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처음에 생각했던 애굽의 추격, 마실 물, 먹을 것, 이방의 침입 등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자 이스라엘은 음식물의 종류, 가나안 땅의 정황, 모세의 지도력 등 새로운 문제들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의 어떤 은혜도 누릴 수 없는 죄인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2. 내가 주어 살게 할 땅에 들어가서

죄인의 실체를 잘 아시는 하나님은 계속해서 친절한 배려를 베풀어 주십니다. 15장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에게 너희가 내가 주어 거하게 할 땅에 들어가서’(15:12), ‘너희가 나의 인도하는 땅에 들어가거든’(15:18)은 이미 저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것을 전제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제 아무리 불평하고, 불순종하고, 배반하고, 부인할 지라도 하나님은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사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셨고 이스라엘은 보장받았습니다. 토라를 주셨을지라도 토라의 준수여부와 가나안의 입성을 전혀 연계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행동이 하나님의 약속에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의 여정이나, 가나안의 입성여부를 걱정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일 뿐입니다.

 

3. 제사를 드리라.

하나님은 가나안 입성을 전제로 한 후 두 가지 측면에서 제사를 드릴 것을 권고하십니다. 하나는, 감사의 제물입니다. 화제나 번제나, 서원을 갚는 제나 낙헌제나 정한 절기에 예물을 드리라는 것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제사가 필요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도 하나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행할 것에 대한 명령이 아니라 인간이 감사 예물을 드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하나님의 다짐입니다. 당연히 인간의 자격이나 구별은 존재하지 않고 이스라엘이든 타국인이든 누구든지 여호와를 아는 사람은 다 감사의 예물을 드릴 수 있도록 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회중이 부지중에 범죄하거나 어떤 사람이 범죄하거든 예물을 드리라고 하십니다. 예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사하여 주시사 죄인들이 사함을 받아 죄의 결과로부터 보호함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범죄는 하나님께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오직 인간의 생활이 어려울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죄의 예물을 통하여 인간이 죄를 지었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사함을 받는 과정을 통하여 죄의 원리로는 인간이 행복할 수 없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4. 옷단에 술을 만들라

하나님의 제도는 절대로 인간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의 의미입니다. 옷단에 술을 매어 달아 술을 볼 때마다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15:39)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계명대로 살아야 인간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하여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15:41)는 선언은 이스라엘을 행복하게 만들어 내야하는 하나님의 책임에 대한 선언입니다. 인간이 행복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이루어 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인간에게 이런저런 규제 조항을 부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규정을 만드시고 준행여부에 따라 인간을 심판하려는 의미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행하실 모든 하나님의 사역이 이루어지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게 되고 가나안에 입성하여 사죄의 예물을 드릴 일을 거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즐겁고 풍성하게 누리며 기쁜 마음으로 감사의 예물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 스스로 우리의 왕이 되려 하느냐? (16)

 

1. 계속되는 인간에 대한 반란

죄인들은 인간 문제의 본질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본질도 알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반항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과 행하실 일들을 알지 못하고, 당연히 하나님이 해결자이심도 알지 못합니다. 죄에 대하여는 전혀 알지 못하고 단지 상황의 변화에만 민감하고 반응하고,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상황을 문제로 삼아 불평할 뿐입니다. 12장에서는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에 반항했고, 16장에서는 레위 지파의 일부가 모세와 아론에게 반항합니다. 아론으로서는 처지가 바뀐 것입니다. 저들의 반항 이유는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16;3),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16:13)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지 않은 일을 자신들의 생각대로 판단하여 저항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고핫, 다단, 아비람, 온 등이 레위지파로 백성들 중에 구별되어 성막에서 봉사하는 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막봉사 대신 제사장의 역할을 구한다고 지적합니다. 본인들도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자임을 인식하지 않으며,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으며, 오직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분별하지 못한 것입니다.

 

2. 하나님 or

다단과 아비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듯 패러디하여 출애굽에 대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여’(16:13),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도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16:14)라고 합니다. 이들의 관심은 애굽이든 가나안이든 땅을 달라, 삶의 보장책을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애굽에도 7년의 기근이 발생할 수 있으며, 가나안은 더욱이 척박하여 바알 숭배가 성행할 수 밖에 없는 환경임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단지 자신들의 기준에 삶의 터전, 살아갈 수단을 확보하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애굽의 나일 강보다, 가나안의 바알 신보다 하나님이 인간 삶의 유일한 보장책임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인에게는 하나님이 땅보다 못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가장 좋은 것을 버리고 가장 나쁜 것을 취하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3. 여호와 멸시

고핫 일당의 행동은 단지 모세에 대한 반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정치 않는 것으로 여호와를 멸시한 것(16:30)입니다. 땅이 갈라져 고라 일당을 삼키는 사건은 하나님의 형벌이 아닙니다. 인간의 갈등과 분쟁은 하나님이 징계하지 않아도 살육의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을 단지 특정인의 특정 행동으로 취급하지 않고 죄인의 어리석음과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내는 계시 사건으로 선용하십니다. 기왕 발생한 죄를 통하여도 하나님을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멸하시기로 할 때(16:21, 45)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을 막아서며, 향로에 단의 불을 취하여 백성에게 달려가 속죄하여 백성을 살려냅니다. 모세와 아론 등 하나님의 사람은 회중보다 특권을 받아 권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하는 책임을 가지는 자들입니다. 실제로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회중과 비교하여 우월적 권위를 누리거나, 특별한 혜택을 받은 것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은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리요, 하나님을 아는 자의 원리입니다.

 

 

. 보장하시는 하나님

 

1. 싹난 지팡이 (17)

이스라엘 가운데 직분에 대한 반란이 일어난다는 것은 직분에 우열이 있거나, 인간이 직분을 받아 내거나 임의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열두 족장에게 지팡이에 이름을 써서 여호와 앞에 두게 하시고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게 하십니다. 지파 중에 마른 지팡이에서 싹을 만들어 내는 지파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며, 모세와 아론이 자신들의 지팡에서 싹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며, 친히 하나님이 자신이 선택한 지파의 지팡이에서 싹을 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행하여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여 주는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잘나서가 아니요, 모세와 아론이 특별한 권세를 가지고 있음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임의로(아무나) 세우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역사를 이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너희에게 대하여 원망하는 말’(17:5), ‘내게 대한 원망’(17:10)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물론 죄인들의 반응은 하나님읨 뜻과는 다르게 망하게 되었나이다’(17:12, 13)일 뿐입니다.

 

2. 레위인에 대한 보장 (18)

하나님이 사람을 구별하시는 것은 언제나 이스라엘을 교육하심입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아론의 탁월성이나 레위지파의 우월성이 아니라 레위지파를 향하여 마른 나무에서도 싹이 나게 하시는 하나님이 너희를 돕는 다는 것을 알아서 기업 없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가르치심입니다. 동시에 레위인의 우월감도 막으시고 제사장은 철저하게 백성들의 죄를 담당할 것을 명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땅을 보장받고 싶어 할 정도로 삶의 안정에 집착할 때에 도리어 레위인은 땅 조차도 얻지 못합니다. 죄인의 관점에서 레위인의 상황은 일체의 삶의 대책이 없는 불안정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레위인을 불안과 두려움으로 몰아넣지 않으십니다. 제사를 강조하면서 레위인의 몫(18:8)을 지정해 주십니다. ‘여호와께 드리는 첫 소산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18:12),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생물의 처음 나는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네 것이로되’(18:1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손에게 주노니(18:19),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18:21) 등은 레위인의 불안함에 대한 하나님의 보장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3. 정결하라 (19)

사람들은 범죄하여 그 생명을 스스로 해합니다(16:38). 백성들의 불평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하시기보다는 저들이 불평하지 않을 수 있도록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 해 주십니다. 불안해하는 자들에게는 불안하지 않을 수 있는 보장을 해 주시는 것이지 없는 믿음을 발휘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충분히 백성들을 가르치신 후에 하나님은 온 백성의 정결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거룩과 정결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그 만큼 백성들 가운데 죄의 요소를 없애 평안과 자유와 행복을 누리고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목적은 온전히 백성들의 행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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