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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와 각종 성경공부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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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 민수기 20 ~ 25

. 죄인의 일상 (20)

 

1. 죄와 계시

인류는 인간의 삶의 문제에 대해 다양한 분석과 처방을 제안하였고,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부단히도 노력하여 왔고 현재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문제는 더욱 다양해지고, 교활해지고, 잔인해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즉 하나님과의 단절, 인간의 성품이 죄적이 된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인간의 존재, 성품, 속성, 원리, 인식을 바꾸지 않는 한 인류의 역사는 동일할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 문제의 원인을 죄라고 선언합니다. 죄를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을 알리는 하나님의 사역이 계시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문제 상황을 해결해가는 이야기,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른 인간, 다른 민족,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크고 강하고 부유하게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2. 광야의 의미

출애굽의 과정에 다양한 계시 사건이 등장했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뜻을 담은 토라와 절기, 제도 등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복락을 누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다 제공하셨습니다. 그러나 죄는 계속됩니다. 애굽의 노예이던 압제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자유를 주었으나 죄를 짓고, 식량과 식수가 전혀 부족함 없이 공급되어도 죄를 짓고, 모든 외부의 적으로부터 막아주고 보호해 주어도 죄를 짓고, 진리를 가르쳐 주어도 죄를 짓고, 하나님이 동행해도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내용을 이루었지만 당장, 빨리가 아니었습니다. 모세에게 출애굽을 선언하셨지만 단번에, 급히가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진입이 약속되었지만 속히, 지름길로가 아닙니다. 광야에서 가장 수고하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원망과 불평을 모두 수용하시고 계속하여 은혜를 주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우지 않는 한, 죄의 사고방식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사고방식을 배우지 않는 한 출애굽과 가나안 입성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3. 동일한 패턴

죄는 속성상 점점 더 커집니다. 39년째 은혜로 살고 있으면서 이스라엘은 가데스에서 또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가데스는 가나안을 정탐했던 곳입니다(13). 가나안에 대한 소망은 온데 간데 없고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도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20:5)라고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하나님은 이번에는 모세로 하여금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게 하시는데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게 행동합니다. 백성은 죄를 짓고, 모세와 아론은 오직 충성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동일한 사람들입니다. 백성은 원망하고 모세는 불순종해도 하나님은 물을 내어주십니다. 어차피 광야 여정은 하나님을 가르치는 계시오, 교육이기 때문입니다.

 

4. 여호와의 거룩

이스라엘의 백성의 죄는 언제나 여호와 멸시 즉 하나님을 인정치 않고, 하나님을 신뢰치 않는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에게도 여호와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다’(20:12)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직접 여호와의 거룩을 나타내십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모세는 가나안을 바라만 볼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격에 따라 선출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되는 것입니다. 백성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 구별된 직분, 별도의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이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주변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성경이 지도자(모세, 사사, , 제사장 등)에게 백성보다 더 큰 추궁을 하는 이유는 지도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많이 은혜 받은 자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일 뿐입니다.

 

 

. 하나님의 보호 (21)

 

1. 호르마

이스라엘은 가데스에서부터 땅과 관련된 사건에 연계됩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의 몇 사람이 아랏의 왕에게 사로잡히자 백성들은 하나님께 구해줄 것을 서원합니다. 이스라엘이 불평대신 하나님께 간구하는 희귀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너무 기뻐서 들으시고 도와주셔서 마침내 이스라엘이 진멸하고 호르마를 차지합니다. 광야를 유랑하다가 드디어 한 성읍을 차지하자 이스라엘은 돌변합니다. 여정에 불만을 품고 다시 애굽을 운운하고 식량 부족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고 노골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저항합니다. 정착하고 있는 에돔을 둘러갈 때 부러워하였고, 호르마를 차지하자 정착에 대한 애착이 생겼기에 이동생활에 불만이 폭주하는 것입니다. 결국 모압 동편에 이르러서 땅을 정복한 후에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고 아예 눌러 살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2. 놋뱀을 쳐다본 즉 살리라

광야는 많은 위험이 있는 곳입니다. 백성들이 말 한대로 파종할 곳도 없고, 먹을 것과 마실 물도 부족하고, 외인들의 침입과 들짐승들의 위험, 모래 폭풍, 폭염 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별다른 위험에 직면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미리 예방하여 주시고 잘 인도하여 주셨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호하지 않으면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부하자 불뱀들이 나타나 많은 백성이 죽었습니다. 그제사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범죄함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하나님은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달게 하십니다. 놋뱀에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고 살길을 제공해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자는 살게 되는 것입니다.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죽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여 사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 놋뱀을 계속 간직하여 분열왕국 시대에까지 분양합니다(왕하 18:4).

 

3. 모압 동편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정탐할 때 거주민은 강하다,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고, ‘스스로 메뚜기 같다’(13:28, 32, 33)고 했습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만나는 적들을 모두 물리치게 하십니다. 에돔은 단지 이스라엘의 통과를 허락하지 않았고, 아모리 왕 시혼은 이스라엘을 치러 나오매 이스라엘이 그들을 쳐서 무찌르고, 점령하여, 거주합니다(21:24, 25). 바산 왕 옥도 이스라엘과 싸우려 나오매 이스라엘이 그들을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그의 땅을 점령합니다(21:35). 하나님은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가나안의 아낙 자손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고, 이스라엘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때에도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것은 승리한 이스라엘과 패한 나라들 모두이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전쟁과 무관한 유랑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긴다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고, 아모리와 바산의 왕과 백성들은 분명히 월등한 전투력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한 군사에게 패한 것을 통해 전쟁은 하나님께 달린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양쪽 모두에게 주어지지만 어느 쪽도 하나님을 배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 이방 종교 (22~24)

 

1. 발락의 종교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여 발람에게 청하여 신탁을 받고자 합니다.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가 죄인들의 종교요,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죄인들은 복과 저주가 신의 결정에 따라 달라진다고, 신이 다스리고 지배하고 통치한다는 것을 권세나 권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교에는 은혜라는 개념이 없고 오직 상과 벌이라는 행위 법칙뿐입니다. 신은 절대로 인간을 도와주지 않으며, 인간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으며, 인간 또한 신을 신뢰하지도 않으며 단지 필요할 때 도움을 청하고 도움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인간을 축복만 하십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고, 멸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은 축복하고 애굽이나 가나안은 저주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하여 열방을 복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의 주인으로서 보호하고 공급하고 책임지고 관리한다는 의미입니다.

발람이 발락의 요청에 의해 모압 귀족들을 따라 나설 때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그 길을 막아섰다는 것도 진노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옳지 못한 길로 가는 것을 막아주시는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발람을 때리거나 병들게 하거나 죽게 한 것이 아니라, 발람을 막아 주시사 어리석은 행동을 못하도록 보호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하여도 발락의 저주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세 번에 걸쳐 계속하여 축복만 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축복하시면서 반대로 모압에게는 저주를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2. 여호와의 사람

발락의 종교인식은 신이 축복과 저주의 권세를 가지고 있고, 신의 중재자인 사람이 축복과 저주를 전달할 수 있는 대리자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종교는 하나님이 인간을 축복하는 것이며 여호와의 사람은 신의 대리자가 아니요, 자신의 임의로 행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행하는 자입니다. 백성위에 높아질 수 없으며, 하나님의 권위를 빌미로 어떤 권세도 부릴 수 없는 자입니다. 발람은 다섯 번에 걸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대답하리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체험한 발람은 스스로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을 합니다. 이 사건도 여호와의 가르치심과 인간을 설복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3.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25)

이스라엘은 바알브올에서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로 하나님을 떠나 바알의 종교에 속하게 됩니다. 소수의, 한 번의 죄된 행동이 아니라 .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목매어 달라’, ‘각가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사람들을 죽이라와 같이 아예 종교적 이탈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백성인데 하나님을 이탈하여 바알종교에 속한 것입니다. 대표로 이스라엘에서 시므온인의 조상의 가문 중 한 지도자 시므리와 미디안 백성의 한 조상의 가문의 수령인 수르의 딸이 죽임을 당합니다. 단지 남, 녀의 문제가 아니라 두 가문이 종교적으로 조인을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두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죽이라 하고, 비느하스가 남녀를 죽이고 이스라엘에 염병이 들어 이만 사천 명이 죽습니다.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진멸하겠다고 선언하시고 레위 자손이 모세의 명에 따라 백성 중에서 삼천 명 가량을 죽였습니다. 이 사건의 핵심은 죽여라가 아니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 앞에서 떠나리라’(25:4)입니다. 이미 이스라엘에 염병이 돌아 많이 죽었고 또 죽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소속되었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죄의 결과에 당하게 될 것을 하나님이 막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비느하스의 행동을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고 하십니다. 즉 비느하스의 행동은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한 것이 아니라 더 큰 죽음 앞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한 행동이라는 의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와 불순종, 우상 숭배에 대해 징계하신다면 단지 몇 명이 죽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스라엘은 멸절되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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