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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와 각종 성경공부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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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강 신명기 12 ~ 16

. 즐거워할지니라 (12)

 

 

1. 죄를 버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이 민족이나 인종적 이유가 없고, 이방과 상대적으로 우월한 상태를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닌 것처럼 애굽이나 가나안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인류의 샘플이듯이 가나안 민족의 진멸에 관한 기사(7:2)는 신앙적 기준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출애굽 당시 애굽에서 행해진 이적이 재앙이 아니라 계시였듯이 가나안 입성할 때 행해질 일들도 징계가 아니라 계시입니다. 열 가지 이적이 애굽의 종교와 관련된 일들로 애굽의 신들을 무력화시킨 것과 같이 가나안에 대해서도 인종적 말살이 아니라 가나안 종교를 몰아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가나안 민족의 진멸에 관한 기사는 불과 한 두 번만 언급되고 대신 가나안 종교 제도를 혁파할 것은 반복해서 언급됩니다(7:5, 12:2~3). 특별히 애굽과 가나안 종교에 대한 조치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출발, 광야 여정, 가나안 입성의 전 과정에서 하나님 이외의 모든 죄적 원리를 떠나라는 권고입니다(12:30~31). 하나님을 배우기 전인 애굽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셨고, 하나님을 배우고 난 이후인 가나안에서는 이스라엘이 직접 행하라는 것입니다. 명령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계시가 선행된 후 하나님을 아는 자의 반응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2.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

12장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표현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12:5, 11, 14, 18, 21, 26)입니다. 그 동안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은 특정 지역인 예루살렘을 의미한 것으로 오해되고 시온주의라는 심각한 왜곡을 만들어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택이 배타적 의미가 아닌 것과 같이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도 특정 지역을 신성화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는 특정 지역을 지명하여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라는 언급이 없었습니다. 더 나아가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라는 지시 자체가 없었습니다. 온 세상과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특정 지역을 구별하여 신성화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맞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은 특정한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주체여호와이심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반대적 표현은 너희가 선택한 곳입니다. 그래서 가나안과 비교하며 그처럼 행하지 말고’(12:5), 이전과 비교하며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12:8),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12:14), ‘너는 스스로 삼가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걸리지 말라’(12:30)입니다. 특정 장소를 의미한다면네 각 성에서 네가 마음에 원하는 것을 모든 것을 먹되’(12:15, 21)가 나올 수 없습니다. 우상 종교, 이방 종교의 특징은 인물, 지역, 사건, 사람의 신성화입니다. 신령해 보이는 것을 자신들이 선별해서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고 구별된 권력과 권위를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우상 종교에는 창조자와 주권자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3. 즐거워할지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선행하신 계시와 연계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신앙을 신성화, 개인화, 신비화하지 않으셨습니다. 종교가 공개되지 않은 채 은폐되고, 개인화되기 시작하면 반드시 비인격적 일탈행위가 발생합니다. 종교적 안위를 위하여 형상이 만들어지고, 우상을 숭배하게 되고,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일들을 행하며 심지어는 그 자녀를 불살라 그 신들에게 드리며(12:31),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며 눈썹 사이의 털을 밀기도 합니다(14:1).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주시는 분이요, 하나님의 말씀과 율례는 종교 제도나 장치 자체가 아니라 모두 인간의 행복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곳으로 나와 예물을 드린 결과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12:7, 12, 18)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책임자이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은혜로 복을 주시고, 인간은 복을 누리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 충분하신 하나님 (13)

 

 

1. 오직 여호와만

성경은 종종 다른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듯 그들의 신들’(12:30), ‘다른 신’(13:2, 6, 13), ‘민족의 신들’(13:7)이라는 표현과, 하나님이 다른 신과 경쟁하며 질투하는 듯한 표현이 나오기도 합니다(20:5, 34:14, 25:11, 4:24, 5:9, 6:15). 만약 하나님께서 실제로 질투하신다면 하나님은 우상들을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하며 경쟁상대로 여기신다는 의미가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상에 대해 헛된 것’(19:4)으로 선언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다른 종교 행위에 대해 외식’(15:7)이라고 선언합니다. 설령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보이고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져도 청종하지 말라’(13:2~3)고 하십니다. ‘네 어머니의 아들 곧 네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다른 신을 섬기자고 꾀어도 따르지 말라고 하십니다(13:6).

하나님의 계시를 배우지 않았다면, 자기 앞에서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이적을 행하면 미혹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계시를 주셨기에 어떤 경우에도 다른 말을 청종하지 말고 따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도우시는 것 중에 부족하고 결핍된 것이 있어 다른 신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지 못하는 영역이 없고, 하나님과는 다른 것을 조종하는 존재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시지만 모든 죄인의 종교는 결국은 인간을 더욱 파멸시키기 때문입니다.

 

 

2. 가증한 일

다른 신들을 섬기자고 미혹하는 자들을 불량배’(13:13)로 언급하며, 그들을 긍휼히,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용서 없이 죽이라’(13:8~9)는 표현은 잔인하고 살벌한 의미가 아닙니다. 도리어 인간의 행복을 지켜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며, 인간의 행복을 깨려는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한 후에 허다한 우상숭배 행위가 발생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모두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성경의 표현법에 담긴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내용 자체로 성도든 비 성도든 모든 인간이 순종할 때 가장 행복한 원리입니다. 어느 인간의 법도 율법의 내용을 넘어서는 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법에는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수고하고 노력한 인간과 안일하고 방탕한 인간의 차별이 당연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토라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전제되어있습니다(13:5, 10, 12).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법이요 하나님을 몰라도 아무도 억울하지 않은 법입니다.

 

 

 

 

. 여호와의 성민 (14~16)

 

 

1. 하나님의 선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으니라’(14:2, 21)고 하십니다. 이미내 백성’(3:7, 10),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4:22),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19:6)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신이 먼저 자격 없는 인간에게 관계를 설정하며, 특히 신의 책임을 선언하는 관계를 선언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언하고, 자기 백성 즉 죄인을 구원하는 좋으신 분입니다(1:21). 인간은 여호와는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배운 하나님의 원리,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원리로 배워 사는 백성입니다. ‘먹을 만한 것과 가증한 것, 부정한 것의 규례도 여호와가 기준임을 의미합니다. 십일조의 규례에 대해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14:23)으로 강조하십니다. 먼저 네 하나님 여호와게서 그 풍부히 주신 것’(14:24)이 전제되고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며’(14:26),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거류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14:29)고 하십니다. 자신의 삶의 근거가 하나님임을 알 때에 가능한 일들입니다. 동시에 말씀대로 행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14:29)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복을 주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수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한 일을 근거로 또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는 복의 선순환입니다.

 

 

2. 여호와의 윤리

매 칠년은 희년 곧 면제(免除)의 해입니다. ‘이웃에게, 형제 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아야’(15:2, 3)합니다. 또한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함께 거주하거든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손을 움켜 주지 말고 반드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어야’(15:7~8, 11)하며, ‘반드시 줄 것이요’(15:10), ‘악한 생각이나(15:9), ‘아끼는 마음’(15:10)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근거는 이미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요, 약속은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15:5, 6, 10), 결과는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15:5), ‘네가 여러 나라를 통치할지라도 너는 통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15:6)입니다. 또한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여자가 팔렸으면 일곱째 해에 자유하게 할 것이고 빈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15:14), ‘그는 놓아 자유하게 하기를 어렵게 하지 마라’(15:17)입니다. 근거는 네 하나님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15:15)이며, 약속은 여호와께서 네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15:18)입니다. 또한 공의로 재판하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너는 공의만을 따르라’(16:18~20)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만이 행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때 모든 인간이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3. 복을 주신 대로

아빕월에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기에 유월절을 지킴으로 기억합니다(16:1).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곡식에 낫을 대는 첫 날부터 일곱 주를 세어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로’(16:9) 칠칠절을 지키며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드린 후에 초막절을 지킵니다(16:13). 일년에 세 번 빈 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립니다’(16:17). 마치 이스라엘이 행할 규례들 같지만 실상이 이스라엘이 절기를 지키도록 하나님이 행하셔야 할 사역들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처음소산부터 마지막소산까지, 백성의 삶을 일년 내내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인간의 수고, 헌신, 충성, 희생,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일체 없습니다. 모든 내용은 하나님이 먼저 행하신 사역에 근거하기에 하나님이 행하신 사역을 알지 못하면, 자신이 하나님께 복을 받았음을 알고 누리지 못하면 행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토라 준수에 담긴 원리를 잘 파악했기에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선언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앙교육의 전형적인 모델입니다. 시내산에서 토라를 받을 때와 비교하여 시간, 사람, 장소, 사건이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토라는 변개되거나 수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변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약속이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과 원리를 알지 못하고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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